시어머니를 통해 시누가 섭섭해한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둘째 조카 태어난 지 반년이 지났는데도 큰오빠가 한 번을 보러 오지 않는다면서. 나 같아도 많이 서운했을 게 분명했다. 새해 첫날, 새로 태어난 시조카도 만나고 신년회도 할 겸 우리 가족은 시누 집을 방문했다.
떡국을 나눠 먹은 뒤 아이들은 놀이방에서 놀았고 어른들은 거실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수필 쓰는 걸 아는 시누가 “언니 감성에 딱 맞는 노래가 있어요!” 했다. 핸드폰으로 검색 후 들려준 곡은 ‘제이레빗’의 〈작은 도롱뇽〉이었다.
나를 헤치지 마요 / 널 헤치지 않아요
그저 조그마한 풀벌레로 입에 풀칠 정도 하지요
‘조그마한 풀벌레’, ‘입에 풀칠’이란 구문을 듣자마자 나는 가슴이 찌릿했다. 소박한 끼니로 연명하며, 자신의 세상에서 평화롭게 살고 싶은 도롱뇽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싶어 가만히 노래에 집중했다. 문득 도롱뇽의 생김새나 먹이 등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구나 싶었다. 서둘러 인터넷에서 찾아본 그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낯선 모습이었다. 개구리의 얼굴과 도마뱀의 몸을 가진 도롱뇽이 무척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 강원도의 작은 부락에 살았다. 마을은 저수지를 중심으로 소와 돼지, 닭을 키우는 집들이 주를 이루었다. 무리 지어 다니며 마을을 탐험하는 게 그 시절 나와 동네 또래들의 하루 일과였다. 봄이면 재미 삼아 개구리 알을 터트리거나 하천에 살던 거머리를 돌로 짓이겨 죽였다. 가을엔 메뚜기를 잡아 강아지풀에 주렁주렁 꾀어 오면 외할머니가 기름에 바삭하게 튀겨 주었다.
낮에는 티나 크래커와 메뚜기튀김을 간식으로 먹고 밤이 되면 아궁이 불 때는 안방 아랫목에 누워 미국에서 수입한 양배추인형을 안고 잠들었던 나. 개발과 미개발의 중간 지점에서 꽤 오랫동안 유아동 시절을 보낸 내가 촌에서 도륙한 생명들 중 도롱뇽은 포함되지 않아 다행이다 싶었다.
아무리 버티고 버티고 버텨봐도 / 또다시 잘리고 잘리고 잘라내도
원하지 않아도 새로운 내 모습을 종종 마주하죠.
도마뱀은 위기의 상황에 처하면 꼬리를 잘라 내고 도망간다. 꼬리는 시간이 지나면 다시 자란다 하니 적 앞에 꼬리를 끊어 냈다고 해서 그를 딱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처세술이 뛰어난 능력자라고만 여겼다. 도마뱀과 같이 도롱뇽도 꼬리를 잘라낼 수 있는 생존 기술을 보유한 종족이었다.
노래 속 도롱뇽은 원하지 않은 상황에서 꼬리를 반복해 잘라낸 이후에 마주한 자신의 모습이 낯설다. 꼬리의 분절 횟수만큼 천적과 맞닥뜨린 상황에 처했다는 의미일 테다. 절체절명의 순간 목숨과 맞바꾼 꼬리는 분절된 순간부터 다시 자라날 때까지 그에게 무섭고 두려운 경험을 상기시켜 주었을 것이다. 고통과 공포를 반복한다는 점에서 분절과 재생의 능력이 그에게 저주라고 느껴지진 않았을까.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는 영화 〈베테랑〉으로 유명해진 대사다. 이는 강수연 배우가 영화계 인사들과의 자리에서 자존심을 강조하며 즐겨하던 말이다. 자기를 잡아먹으려는 적 앞에 도롱뇽은 왕년의 강수연 배우처럼 호기롭게 외쳤을 것이다. “야! 내가 힘이 없지, 살 재주가 없냐!”
끙차! 꼬리를 잘라내고 적이 한눈판 사이에 안간힘을 써 그 자리를 벗어났다.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가 싶더니 어느새 그의 두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비단 끊어진 부위가 욱신거려서만은 아니었다. 몇 달 동안 멋들어지게 길러 낸 꼬리가 이제야 겨우 자리를 잡았는데…. 길고 단단했던 꽁지가 한순간에 빠져버린 게 허망했다. 이야말로 힘은 없지만 가오는 지켰던 도롱뇽의 늠름한 외용이었다.
도롱뇽처럼 타인에게 피해 주지 않고 낮은 자세로 살고자하는 이에게는 되레 군림하려는 자들이 많다. 배려하는 마음으로 친절하게 대했지만, 상대방은 고마워하는 대신 당연한 듯 선의를 착취하기도 한다. 꼬리를 내어 준 도롱뇽의 호의에 대해 그것을 받아 든 자는 과연 고맙다고 여겼을까? 다음에 만나면 그간 자란 꼬리를 냉큼 또 받아 내야지하고 벼르진 않았을는지…. 도롱뇽이 잘나 낸 꼬리는 호의로 흔쾌히 내어 놓은 것이 아니다. 생존을 위한 절규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적당한 합의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찢어 낸 살점일 테다. 누구도 상대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요구할 자격은 없다. 빚 마냥 받아 마땅한 호의가 어디 있을까. 가볍게 건네받은 배려 같아 보여도 실은 어떤 이가 힘겹게 떼어낸 고통의 일부일지 모른다. 재생 가능했어도 실은 죽음 대신 바친 희생물이었던 도롱뇽의 꼬리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