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격차’라는 표현이 있다. 넘볼 수 없는 차이를 만드는 격이란 뜻이다. tvN 채널에서 방영된 <어쩌다 어른>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미술사학자 양정무 교수는 석굴암을 칭하며 초격차라는 말을 더했다. 그에 따르면 석굴암은 원래 스스로 항습·항온이 가능한 구조였는데 일본인들이 보강과 재건이라는 이유로 시멘트로 외벽을 덮어버린 이후 결로·침수 현상이 생겼다고 한다. 현재는 인공시설인 에어컨으로 유지관리가 되고 있다는 설명에서 유적에 대한 일본인의 저속한 만행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가만있자, ‘초격차 석굴암’은 어떤 모습이었지?
어린 시절 사진이 담긴 앨범 속에는 불국사 앞에서 웃고 있는 내가 있다. 초록색 하계 체육복을 입고, 옷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체크무늬 헌팅캡으로 한껏 멋 부림을 한 사진 속 여자애는 분명 나였다. 기억의 창고에 없다 하여 그것이 실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라 했건만(배귀선, 『기억의 디아스포라, 그 유랑의 재구성』 中) 삼십 년이 넘은 시간 탓인지 경주로 떠났던 수학여행에 대한 추억이 별로 없었다. 대신 십칠 년 전 2번째 경주여행이 떠올랐다.
신혼 초 우리 부부는 결혼기념일마다 국내여행을 하자고 약속했다. 해마다 우리나라 곳곳을 여행을 하며 결혼한 날을 기념한다면 서로에게 큰 의미가 될 것 같았다. 한 가지 우리가 간과한 점이 있었다. 12월에 결혼한 탓에‘결혼기념’이라는 이름을 붙이려면 일러도 11월, 늦어도 1월에 떠나야 했는데 그 말은 한겨울의 추위와 여행을 함께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어디로 가야 조금은 따뜻할까? 고심 끝에 첫 번째 결혼기념 여행은 경주로 정했다. 출발하는 날, 맑았던 서울과는 달리 경주는 비가 내렸다. 날씨가 도와주지 않는다며 툴툴댔던 나는 톨게이트를 보는 순간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기와 모양의 톨게이트가 “역사와 전통의 도시, 경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하는 듯해 나 역시 “우리가 왔습니다!”라며 답하고 싶었다.
보문단지 내 호텔에 짐을 부리고 우리는 서둘러 불국사로 향했다. ‘경주 = 불국사’라는 공식이 강렬했던 나는 불국사를 제일 먼저 가자고 남편에게 청했다. 학창 시절 이후 처음 방문한 경주라 수학여행의 코스를 성장한 어른의 눈으로 다시 감상해 보자는 것이 이번 여행의 계획이었다. 불국사로 향하는 길은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친구를 보러 가는 것처럼 설렜다.
가는 도중에 호스텔들이 여럿인 동네를 잠시 들렀다. 내가 수학여행 때 묵었던 숙소가 이 중 하나일 듯했다. 건물들의 외관은 예전의 기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째 하나도 변하지 않았을까 신기했다가 그곳의 정체성이 ‘오래됨과 낡음’일거라며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나는 큰 세면실에 일렬로 놓인 수도꼭지 하나씩을 차지하고 쫓기듯 밀리듯 우르르 씻었던 일, 옆 숙소에 묵었던 남학생들이 베란다로 쪽지와 과자를 던져 날렸던 일 등을 남편에게 말하며 깔깔거렸다. 그 순간만큼은 여고생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잊었다고 생각한 일들이 하나 둘 떠올랐다. 남편 역시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던 수학여행의 추억들을 털어놓았다. 우리는 어딘가에서 교차되었던 서로의 추억을 회상하며 동네를 천천히 산책했다.
호스텔들이 운집해 있는 골목을 가볍게 걸은 후 우리는 토함산 드라이브코스를 따라 불국사로 이동했다. 그곳은 S자로 굴곡진 커브길이 많았고 중간에 차를 세울 곳도 마땅치가 않았다. 앞차에 맞추고 뒤차에 방해되지 않도록 적절한 속도를 유지하며 조심스레 운전했다. 도로가의 나무들은 공장의 어셈블리라인에 올려둔 조립부품처럼 높낮이를 달리하며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를 보고 있자니 뱅글뱅글 돌고 도는 회전체를 보는 듯 최면에 걸린 느낌이었다.
결혼한 지 이제 1년, 우리는 부부라는 새로운 관계에 적응 중이었다. 평일 밤 친구들과의 술자리가 여전히 좋았고, 상대방의 부모를 마주하는 일은 부담스럽고 어색했다. 마치 관계에서 기선을 제압하는 데 혈안이 된 사람들처럼 싸울 때마다 화해에 도달하기까지는 비둘기호 열차보다 더뎠다. 이번 여행을 통해 서로에게 집중할 시간을 갈망하고 있던 우리는 운전하는 동안 진지한 마음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남편이 갑자기 물었다.
"우리 아이 태명은 무엇으로 할까?"
나는 아직 생기지도 않은 아이의 태명은 왜 고민하냐며 그를 타박했다. 내게 아이란 미지의 대상이었을 뿐 전혀 현실적이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결혼한 부부에게 아이는 자연스레 올 테니 태명을 미리 정해놓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개인적으로 딱풀이라는 태명은 싫더라. 아이를 문구점의 상품명으로 부르고 싶지 않아. 한방이란 이름도 너무 가벼워 보여. 아이를 농담거리로 만든 것 같아.”
내 입에선 이름에 대한 다양한 소견이 줄줄이 쏟아졌다. 그는 나의 전공이 영어임을 들어 영어로 이름을 지어보는 건 어떠냐고 물었다. 본인은 조동사 캔(can)처럼 능력이나 가능성을 나타내는 단어가 좋다고 덧붙였다.
"캔은 깡통이란 뜻도 있어 좀 그렇고…… 아! ‘윌(will)’은 어때? 미래시제 조동사니까 앞날에 대한 희망이나 의지가 느껴지지 않아?"
남편 역시 그 이름이 느낌도 좋고 의미도 멋지다고 했다. 불국사 가는 길에 태명을 정함으로써 이름을 가진 실체가 우리 마음에 들어왔다.
언젠가 맥주를 마시면서 딩크족(DINK, 맞벌이 무자녀 가정)으로 몇 년은 더 살아도 괜찮지 않겠냐고 가볍게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뿐이었다. 아이에 대해 진중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본인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다 믿는 이기적인 엄마아빠가 과연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물었던 질문에 대한 답은 항상 부정적이었다. 그런데 이름이란 것을 떠올렸더니 대상은 형체를 갖추고 다가왔다. 허공에 나직이 부르면 당장이라도 부름에 답하며 등장할 것처럼….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불국사로 걸어가는 내 속에서 윌이라는 실존인물이 점차 선명해졌다. 마음으로 아이를 빚으며 그렇게 불국사로 향했다.
사찰 입구의 당간지주를 지나자 자하문과 청운교·백운교의 모습이 보였다. 남편과 나는 동시에 "여기다!" 하며 환호를 터트렸다. 교과서에서 보았던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건 늘 감동이었다. 새로웠던 건 고등학교 때는 없었던 극락전 복돼지상이었다. 복돼지상은 만지면 행운이 온다는 설이 있어 사람들이 한 줄로 서서 차례차례 조각상을 쓰다듬고 있었다. 우리도 줄 끝에 서서 순서를 기다렸다. 기대와 희망으로 나는 손끝에 힘을 더해 천천히 차가운 금속상을 쓰다듬었다.
대웅전 불상 앞에서도 같은 마음을 담아 기도했다. 바람이 전적으로 이뤄지기를 바라고 하는 행위는 아니었다. 준비하는 자에게 기회가 주어진다고 하지 않았던가. 발원을 함으로써 이를 위해 더욱 노력을 정진하자는 스스로의 다짐을 의미했다. 남편은 내가 무엇을 빌었는지 궁금해했지만 나는 그저 “비밀이야!”하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구체적 계획도, 서로 간의 합의조차 공유되지 않은 상태에서 내가 아이에 대해 발원했다는 게 스스로도 낯설었다.
해가 슬슬 서쪽으로 질 무렵, 대웅전을 나와 다른 관광객들 속에 섞여 다보탑과 석가탑을 구경한 우리는 석굴암으로 향했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꼭 석굴암을 관람하고 싶었다. 한참 동안 불국사 구경을 하다 온 탓에 피로감이 밀려왔는데 막상 석굴암 앞에 서니 심봉사가 개안한 듯 눈이 번쩍 떠졌다. 전경이 한눈에 다 들어오는 작은 곳이라는 게 오히려 더 좋았다.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인자하고 영험한 인상의 석굴암 본존불을 감상하며 산속의 작은 암자에서 영혼의 위로를 받았다.
여행기간 동안 남편과 나는 천마총과 경주국립박물관까지 알차게 방문한 후 서울로 돌아왔다. 1박 2일의 짧은 여행이었으나 여운은 오래 남았다. 결혼 전후의 변화된 상황에서 나는 적응에 매진하면서도 심리적으로 변화를 거부했다. 남편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결혼 전과 다름없이 온전한 ‘나’이기를 고집했다. 이로 인해 발생한 갈등과 상대방이 느낀 서운한 감정은 애써 외면했다. 경주에서의 짧은 여행기간 동안 이런 것들이 각성되면서 현재를 인정하고 미래를 향해 정진할 의지를 갖게 되었다.
이후 우리는 ‘윌’이라는 이름을 붙여줄 아이를 기다렸다. 임신을 위해 노력했고 계속해서 실패했다. 의지만 있으면 될 줄 알았는데 의학적 도움을 받아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모든 일에 자신감이 넘쳤고 내 삶에 실패는 없다며 오만했던 만큼 내가 느끼는 좌절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낸 어느 여름날, 남편과 나는 강아지를 입양했다. 녀석의 이름을 윌이라고 지은 것은 자연스러운 결정이었다. 임신에 집착해 스스로를 갉아먹던 나는 개를 가족으로 들인 이후 차차 심리적 안정감을 되찾았다. 매일 한두 시간씩 산책하면서 몸과 마음의 건강도 회복했다. 그 덕분일까? 그토록 기다리던 아이도 갖게 되었다.
‘이름’에 대해 사고가 깊었던 우리였지만 정작 아이에겐 별다른 태명이 없었다. 어떤 이름에도 깊은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았다. 미리 지어준 태명이 아이를 이끌지 않았던 것처럼 호칭에 따라 대상의 삶이 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대신 우리는 아이에게 일찍부터 호적에 올릴 이름으로 불러 주었다.
짧게 불렸다 사라져 버릴 이름이었던 ‘윌’이 개에게 주어진 순간 열 달이 아닌 십 년의 기간 동안 호명될 수 있었다. 본명으로 불린 아이도 태중에 있을 때부터 호칭의 혼동이 없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강아지나 윌이란 이름, 그리고 아이 모두가 행복한 결과였다. 자고로 이름이란 많이 불러 주어야 그 탄생의 의무를 다하는 것일 테니까.
윌은 재작년에 세상을 떠났다. 나는 종종 녀석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이름을 뱉는다. 그리움이란 접착제로 다져진 절절한 나의 부름은 흩어짐 하나 없이 그 이름의 주인에게 닿을 거라 믿으면서….
문득 녀석의 이름을 떠올린 경주가 그리워졌다. 세월의 더깨를 더한 석굴암과 불국사도 궁금해졌다. 퇴근하는 남편에게 말을 건넸다. “여보, 우리 18주년 결혼기념 여행은 경주에 다시 가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