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못 치는 법: 스무 번 녹음하기

기계화 세상이 와도 우리가 잃으면 안되는 것

by 프린스턴 표류기
the-cat-concerto-c2a9-mgm.jpg Tom and Jerry, “The Cat Concerto” (MGM, 1947) 제리의 방해에도 톰의 연주는 훌륭하다.


나는 얼마 전 석 달 정도에 걸쳐 한곡을 완성해 보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유튜브 성인 피아노 커뮤니티에 가입 했다. 사람들은 선생님의 지도아래 서로를 격려하며 함께 연습한다. 외롭던 나는 즐거운 마음에 연습 녹화 숙제를 마감에 맞춰 성실히 냈고 대화에도 참여해 생각을 나누었다.


가장 중요한 숙제는 최종 리사이틀. 미팅 앱에서의 온라인 실황 연주는 소리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기 때문에 각자 녹음해서 다 같이 듣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현장 연주가 아니고 녹음이라니. 만만해 보였다. 느긋한 자세로 연습했다. 피곤하면 놀았다.


마감 이틀 전 녹음에 돌입했다. 예상한 대로 평소 연습부족했기 때문에 미스터치가 많아서 여러 번 녹음했다. 결과적으로 못해도 20 번은 반복 친 것 같다. 그리고 결과물은 참담했다. 틀리는 건 그렇다 쳐도, 틀리지 않는 부분에서조차 피로와 초조가 완연하다. 빨리 끝나기만을 바라고 생각 없이 읽는 국어책 같은 느낌이랄까.


괴로웠다. 제출 후 이삼일 의기 소침했다. 사실, 세상은 내게 그다지 관심이 없다. 리사이틀 날 사람들은 내 영상에 별로, 심지어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나만 진정하면 되는 일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나는 이토록 괴로운 것일까?


음악에 감정과 개성을 넣으려면 소리의 질과 농도를 조절할 고차원적 테크닉이 필요하다. 나 같은 늙다리 아마추어가 함부로 얼씬 거릴 수 있는 경지가 아니라는 건 잘 안다. 그래도 기계 같지는 않은, 무언가 살아있는 느낌은 어떻게든 실어보고 싶은 욕심은 있었다. 그러니까 국물도 별로고 김치맛도 형편없을지라도 손맛만은 살아 있는 손칼국수를 만들어보고 싶은 마음이랄 까? 초등학생이 만든 국수라도 손으로 만들면 손맛이 있다. 이건 아이와 요리해본 경험상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내 녹화도 솔직히 초반엔 많이 틀렸어도 뭔가 초등학생이 만든 국수 같은 맛이라도 있었다. 그러나 녹음이 반복되며 그것이 사라졌다. 그게 서러움의 원천 같다.


기계 국수는 왜 맛이 없나. 모든 부분의 맛과 질감이 같기 때문이다. 이랬다 저랬다 다르면 오히려 큰일 난다. 동네 허름한 맛집 할머니가 슥슥 썰어주는 손국수의 맛있는 비뚤어짐이 전혀 없다.


스무 번이 넘는 단순 반복에 지친 아마추어의 뇌와 근육은 음악의 긴장과 흥분을 따라 맛있는 비뚤어짐 같은 걸 만들 능력이 없었다. 내 머릿속은 오로지 ‘얼마 안 남았다. 어떻게든 끝까지 녹화’라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문득 ‘너무 딱딱한 것 같다, 조금 더 용감해야 될 것 같은 데, 하지만 또 틀리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한꺼번에 들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는 순간이 온다. 이건 비상상황이다. 손가락은 경련하며 아무 건반이나 누른다. 중단, 그리고 재녹음.


생각 금지, 모험 금지. 나의 연주는 갈수록 저질 기계국수가 돼간다.


이런 경험은 비단 아마추어의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물론 프로 피아니스트들은 몸이 지쳐도 실수를 거의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도 지치면 자신의 귀에는 분명히 들리는 소리의 기계화 순간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가, 에너지가 고갈되는 스튜디오 녹음을 기피하는 거장들도 많다고 들었다.


내 부끄러운 피아노 이야기를 굳이 하는 이유는 이번 경험으로 균일화가 얼마나 결과물의 질을 낮추는지 봤기 때문이다. 일견, 예측가능성이 있어야 모든 것이 착착 맞아 들어갈 것 같다. 그런 걸 잘하는 기계가 점점 발달하면 세상은 효율적으로 쌩쌩 돌아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은 그런 균일함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을 기쁘게 하고 깨어나게 하는 것은 미세한 불균일성, 불완전함, 의도치 않음. 그 속에 녹아있는 맛있는 비뚤어짐이다. 나는 그걸 잃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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