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로비츠가 내 피아노를 연주한다?

삼억원짜리 장난감: 스타인웨이 스피리오

by 프린스턴 표류기
싫어할 수 없는 괴짜 피아니스트 호로비츠 (1903-1989)


기계가 사람처럼 피아노를 칠 수 있을까? 그렇다. 이미 시장에는 스타인웨이의 스피리오 (Steinway Spirio), 야마하의 엔스파이어 (Yamaha Disklavier ENSPIRE)처럼 자동 연주 기능을 갖춘 피아노가 나와 있다.


인간 피아니스트처럼 정교히 손가락을 놀리는 로봇을 만들기는 현재의 기술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자동 피아노의 비싼 값을 생각하면 좀 아쉽지만 사람 모양의 로봇은 따라오지 않는다. 대신 사람처럼 겉에서 건반을 누르기보다는 피아노 속에서 건반 뒤쪽을 ‘들어 올려’ 망치를 움직이는 방식을 쓴다. 이렇게 피아노 속에서 피아노를 치다 보니 겉으로 보면 유령이 치는 것처럼 건반만 오르내린다. https://www.youtube.com/watch?v=aGY87KUuz8E

앞에서 누르거나 뒤에서 올리거나 건반 레버가 해머를 움직여 현을 때리는 것은 같다.


스타인웨이 쇼룸에 가서 스피리오를 봤는 데, 사람도 없이 혼자서 피아노를 정말 잘 친다. 그도 그럴 것이, 피아노 건반을 누르는 것은 기계지만 언제 어떻게 누를 것인지 정한 것은 랑랑, 머레이 페라이어 같은 일급 피아니스트, 심지어 이미 우리 곁에 없는 루빈스타인, 호로비츠 같은 전설의 피아니스트 들이기 때문이다. 즉, 스피리오는 자신만의 음악적 개성을 갖춘, 진정한 로봇 피아니스트라기보다는 이미 녹음된 피아니스트의 소리를 초고해상도로 데이터화하여 현을 치는 망치의 움직임을 그대로 재생하는 기계라고 보면 된다.


훌륭한 피아노 연주에는 따뜻한 소리, 차가운 소리, 웅장한 소리, 속삭이는 소리 등등 수많은 다른 소리가 들어있지만, 순수하게 물리적인 시각에서 보면 피아노 소리는 현을 때리는 망치의 운동에너지의 결과물일 뿐이다. 게다가 피아노의 망치는 질량과 운동거리와 각도가 상수로 정해진 물건이므로 피아노 소리는 곧, ‘망치가 움직이는 속도’라는 한 가지 변수로 단순화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저절로 피아노를 치는 기계를 만들기는 생각보다 복잡하지 않다. 이런 방식으로 움직이는 스타인웨이 스피리오의 경우 (그들의 웹사이트 광고에 의하면) 1020개의 속도레벨로 망치를, 256개의 위치 레벨로 페달을 제어하기 때문에 기계지만 우리의 귀에는 마치 진짜 인간의 연주처럼 들린다. 그러므로 이제는 길고 복잡한 곡, 개성적인 연주도 디지털 데이터화가 가능해졌고, 이를 물리적으로 실행할 악기만 있다면 언제 어느 곳에서나 실시간 연주를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https://youtu.be/mfprFtmTb5k?si=YPJ2mM5_5UaF6Hfe

Chopin Waltz in E minor Posthumous


그렇다면 앞으로는 이 세상 피아니스트들이 일생에 딱 한번 녹음을 하고 나면 투어가 전혀 필요 없어지는 날이 올까? 심지어 음대가 사라지고, 대신 저런 데이터로 교육받은 에이전트 인공지능들이 사람과 다름없는 아름다운 연주를 들려주는 세상이 올까?


스타인웨이의 주장에 의하면 돈만 내면 나도 우리 집에 스피리오를 들여놓고 날마다 거장들이 치는 생음악을 언제나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생음악이란 어제 연주의 단순 반복이 아니다. 알다시피 자동연주 피아노는 인간인 피아니스트가 소리를 통해 실시간 전달하는 '현재의' 감정을 표현하지 못한다. 그뿐만이 아닌 것이, 피아노라는 악기는 날씨, 방의 구조, 사람의 유무 등에 의해 섬세하게 반응하며 소리가 변한다. 그래서 훌륭한 피아니스트들은 매 순간 정교히 손과 발을 조절하며 그때그때 다르게 피아노를 친다.


아무리 랑랑이 스튜디오에서 완벽히 녹음해 둔 데이터 그대로 우리집 스피리오 피아노로 친다 해도 비가 왔던 어제와 맑고 해가 뜬 오늘의 피아노 소리는 같은 수가 없다. 오늘의 마른 소리를 들은 랑랑이었으면 분명히 바꾸어 주었을 터치와 페달의 깊이를 내 스피리오는 알아서 바꿀 능력이 없다.


해머와 페달의 해상도는 따라왔을지 모르나 애초에 인간의 데이터가 있어야 연주가 가능하며, 예측불가한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은 아예 없기 때문에 자동피아노가 인간을 대체할 것 같지 않다. 복권에 당첨된다면 나도 스피리오를 사보고 싶은 마음은 있다. 그렇다 해도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음악회 소식을 검색하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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