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아보기로 했다
(필사의 말들)『월든』 헨리 데이비드 소로
“내가 숲 속으로 들어간 것은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아보기 위해서였으며,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들만을 직면해 보려는 것이었으며, 인생이 가르치는 바를 내가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고자 했던 것이며, 그리하여 마침내 죽음을 맞이했을 때 내가 헛된 삶을 살았구나 하고 깨닫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삶이 아닌 것은 살지 않으려고 했으니, 삶은 그처럼 소중한 것이다. 그리고 정말 불가피하게 되지 않는 한 체념의 철학을 따르기는 원치 않았다. 나는 생을 깊게 살기를, 인생의 모든 골수를 빼먹기를 원했으며, 강인하고 엄격하게 살아, 삶이 아닌 것은 모두 때려 엎기를 원했다.” (P.139)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했으나 안정된 직업을 갖지 않고 매사추세츠 콩코드 마을 근처에 있는 월든 호숫가에 집 한 채를 짓고 육체노동을 하며 2년 2개월을 살았다. 그는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아보기 위해 2년 2개월이라는 시간을 스스로에게 주었다.
숲 속에 들어가는 대신 나는 의도적으로 인생을 살아보기 위해 3년이라는 시간을 내게 주기로 했다. 어떤 욕망은 가슴속 저 밑에 침잠하고 있다가 그 욕망을 부추기는 문장을 만나 폭발할 때가 있다. 내게는 『월든』의 이 네 문장이 그랬다. 한 번쯤은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아보고 싶었다. 둘째까지 대학생이 되어 집을 떠나고 20여 년 가까이해 온 육아라는 대단원의 막이 막 내려진 참이었다. 전업주부로 살아온 지 20년. ‘내 품에 있는 동안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하자’라는 모토 하나로 살았고 스스로에게 ‘이만큼 했으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싶을 정도로 어느 정도 바람은 이루어졌다. 물론 내 기준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최우선이었기에 당연히 내 시간은 항상 뒷전이었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시킨 것도 아닌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치 직무유기를 하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제 육아라는 가장 중요한 과업을 끝냈으니 내게 시간이라는 선물을 주고 싶었다. 이 선물을 글 쓰는 시간으로 보내고 싶었다. 아이들을 키우는 동안 나를 위해 유일하게 한 일은 일주일에 한 번 한 권의 책을 읽고 토론하는 모임에 참석하는 것이었다. 10년 넘게 이어져 온 읽기에 지쳤는지, 아니면 머리에 집어넣기만 하는 것에 지쳤는지 어느 순간부터인가 ‘읽지만 말고 네 글을 써야 하지 않아?’라며 나를 채근하는 목소리가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들리기 시작했다.
긴 인생에 있어 3년이라는 시간은 어떻게 보면 찰나일 수도 있지만, 현실은 이런 마음을 먹은 내게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남편은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았으나 은근히 일하러 나가길 바라는 눈치였고, 친정 식구들은 이날만을 기다렸다는 듯 대놓고 묻기 시작했다. “애들도 다 컸는데 이제 일을 해야 하지 않아?” 마치 명절날 결혼 안 한 처녀, 총각들에게 “결혼은 언제 할 거야?”라고 묻듯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친척들이 빙 둘러앉아 있으면 일을 안 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나는 결혼 안 한 처녀, 총각도 아닌데 명절이 싫어졌다.
이때쯤이었나 보다. 책을 더 깊게 읽고 싶은 마음에 독서토론 리더를 양성하는 숭례문학당에서 입문, 리더를 거쳐 심화 과정을 수료했는데 감사하게도 강사 제안이 들어왔다. 제안이 들어온 것일 뿐 차후 문제가 있었지만 어찌 되었든 선택을 해야 했다. 강사가 되면 도서관에 나가 독서 토론을 진행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토론 경험도 살릴 수 있고 남들 보기에 어엿한 강사라는 사회적 직함도 생길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한 번에 하나밖에 못하는 사람이라는 거다. 이때쯤 나는 뭐라도 써야겠다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강사로 활동하게 되면 읽기만 하는 책 읽기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읽기만 하는 무한반복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강사도 하면서 글도 쓸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 능력이 내겐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글을 써야 하는데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후회할 것 같았다. 강사 자리에 서 있는 나를 상상해 봐도 행복하지 않을 것 같았다. 리더과정을 함께 수료한 선생님께 조언을 구했더니 “아니, 좋은 기회인데 왜 그러시는 거예요? 식탁에서 글 쓰는 작가들도 많아요. 틈틈이 쓰면 돼요.”라며 나의 고민을 어이없어했다. 지인들은 한술 더 떴다. “아니, 그 나이에 불러주는 데도 없는데 감사하게 생각해야지. 얼른 한다고 해.” 라며 나를 재촉했다.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마음의 소리를 따르기로 했다. 인생에 한 번쯤은 의도적으로 살아보기로 했다. 글이라는 굴을 깊이깊이 파보리라 결심했다. 마지막으로 강사 제안을 함께 받은 선생님께 속내를 털어놓았다. “쓰고 싶은 게 있어요. 그런데 지금 강사를 하게 되면 평생 못 쓸 것 같아요.” “쓰고 싶은 게 있어서 강사를 안 한다고요? 대단하네요. 정말 멋진데요?” 말은 이렇게 하는데 얼굴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말과 표정이 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나밖에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무슨 이해를 받겠다고 여기저기 묻고 다니는지. 답은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주위 사람들의 이해할 수 없음을 등에 얹고 나의 글쓰기는 시작되었다. 헨리 데이비드의 소로의 이 문장들이 없었다면 용기마저 내지 못했을 것이다.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아보기로 3년의 시간. 이 시간들 속에서 지금 나는 행복하다. 쓰는 행위에 온 에너지를 쓸 수 있음에 감사하다. 이 시도 하나만으로도 후회하지 않을 인생을 산 듯하다. 감히 생을 깊게 살아본 적이 있노라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이거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