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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 Nov 20. 2024

6.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필사의 말들) 한강 『채식주의자』

(장면 1)

“너 정말 어쩌려구 그러니? 사람한테 필요한 영양소가 있는 건데...... 채식을 하려면 제대로 식단을 잘 짜서 하든가. 얼굴이 그게 뭐야.” (언니)

“저는 딴 사람인 줄 알았어요. 얘기는 들었지만, 그렇게 몸 상해가면서 채식하는 줄은 몰랐지 뭐예요.” (올케)

“지금부터 그 채식인지 뭔지는 끝이다. 이거, 이거, 이거, 다 먹어라 얼른. 없어 못 먹는 세상도 아니고 무슨 꼴이냐.”(엄마)

“두 사람이 영혜 팔을 잡아라. 한 번만 먹기 시작하면 다시 먹을 거다. 세상천지에, 요즘 고기 안 먹고사는 사람이 어디 있어! ”(아버지)

“누나, 웬만하면 먹어. 예, 하고 먹는 시늉만 하면 간단하잖아.” (처남) (p.54-58)

    

(장면 2)

“이모가 갑자기 3킬로그램이 쪄서 본인 의지로 못 뺄 것 같아 다이어트약 먹었다는데 너도 한 번 먹어볼래?” (엄마)

“운동하면 살 빠질 텐데 아빠가 헬스장 이용권이나 필라테스 이용권 끊어줄까? ”(아빠)

“살 안 빼냐?”(오빠)

“무슨 스트레스받는 일 있어? 건강이 안 좋아 보이네.”(작은 엄마)

“왜 그렇게 살쪘어?”(외할머니)

    

『채식주의자』의 ‘채식주의자’는 상식에 들어맞지 않는 사람을 배제하거나 통제하려는 공동체의 폭력성을 보여준다. 노브라, 채식, 정신병원을 바라보는 적대적인 시선들이 이런 폭력을 구성한다.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라는 주인공 영혜의 말은 ‘시선’이라는 단어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공동체의 폭력성은 비단 소설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우리 집 예외는 아니었다. 공동체의 폭력성이 아무렇지 않게 딸아이를 향해 가해지고 있다는 걸 ‘채식주의자’를 읽으면서 알았다. 내가 하는 말이 폭력의 말이었다니! 

    

지난 추석 때였다. 원래도 날씬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딸아이가 통통함을 넘어 뚱뚱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갑자기 체중이 불어난 난 모습에 다들 한 마디씩 하느라 바빴다. 사회생활도 힘들 텐데 베이스캠프여야 할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딸아이는 그렇게 융단폭격을 맞아야 했다. 물론 가족이니까 건강이 염려스럽고 걱정되는 마음이 우선이었겠지만 그게 전부였을까? 실은 정상 체중을 벗어난 사람에게 빨리 정상 체중으로 돌아오라는 강요는 아니었을까? 너는 지금 정상이 아니니 빨리 정상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협박 아니었을까?

     

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본다. 나 또한 표면적으로는 딸아이의 건강이 걱정된다고 말하지만 사실 뚱뚱한 딸아이가 부끄럽기 때문은 아닐까? 남들에게 자랑스럽게 보이고 싶은 모습이 아니기 때문에 살을 빼라고 재촉하는 건 아닐까? 불편한 이야기지만  맞는 것 같다. 어떻게든 딸아이를  구슬려 살을 빼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 잠을 설친 적도 있었다. 뚱뚱한 자식을 받아들이기가  인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내 딴에는 우회적으로 돌려 살을 빼야 한다고  이야기하곤 했지만 자기를 바라보는 엄마의 시선을 딸아이가 모를 리 없었다. 느끼지 못할 리 없었다. 표현방식만 다를 뿐 살을 빼야 한다고 밀어붙이다  날 선 아이의 말에 흠칫 놀라 물러선 적도 있었다.  '꼭 뺐으면 좋겠다'라는 나의 집요함은 이러다 정말 딸과의 관계가 악화되겠다 싶기 바로 직전까지 되풀이되었다. 다행히  멈출수밖에 없었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널 순 없었다.


정상성을 벗어난 사람이라 생각되는 딸아이에 대한 나의 시선은 이렇듯 폭력적이었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하는 말이 폭력에 가까운 말이라는 걸 알았다는 데 있다. 아마 다른 가족들은 이렇게 반발할지도 모른다. “무슨 말 한마디 한 걸 가지고 폭력이라고까지 해. 너무 심한 거 아냐?” 나도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가족들이 딸아이에게 한 말들을 한데 모아 이렇게 써놓고 보니 분명 정상에 맞지 않는 사람을 배제하거나 통제하려는 공동체의 폭력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육체적으로 물리적으로 힘을 가하는 것만이 폭력이 아니란 걸 알았다.

      

알았다고 해서 내가 딸을 바라보는 보는 시선이 한 번에 바뀔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문득문득 한숨지으며 예전처럼 생각할 수도 있다. ‘저 살을 어쩔 거야? 살만 빼면 진짜 예쁠 텐데.’ 무려 50년 동안이나 내면화된 정상성에 대한 개념은 책 한 권을 읽었다고 해서 바로 사라질 만큼 만만한 놈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제는 더 이딸아이에게 살을 빼야 한다고 몰아붙이지는 않을 것이다. 마치 계몽해야 할 대상인 양 쳐다보지도 않을 것이다. 이렇게 조금씩 바뀌면 된다.


딸아이의 일을 겪고 보니 과체중 사람들이 이기 시작한다.  주변을 둘러보니 생각보다  많다. 내가 몸 담은 모임에 곳곳에 여러 명이다. 그들도 딸아이가 느꼈을 시선들을 받아왔겠지? 얼마나 많은 시선들을 견뎌왔을까? 내 시선 그것들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이제는 그 수많은 시선들 중 하나가  내가 아니길 란다.

    

희망적인 건 “왜 그렇게 살쪘어?”라고 묻는 외할머니의 물음에 딸아이가 웃으면서 응수한  말이다.

“왜요? 살찌면 안 돼요?”

그러게. 살찌면 안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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