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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현대는 일종의 질병이다

(필사의 말들) 알랭 드 보통 『현대 사회 생존법』

by 하늘

“현대는 우리를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만들었을지라도, 막대한 정서적 통행료도 함께 부과했다. 우리를 소외시켰고, 시기심을 키웠으며, 수치심을 증폭시켰다. 서로 갈라놓았으며, 어리둥절하게 만들었고, 진실하지 않은 억지웃음을 짓게 했으며, 성마르고 화가 가득한 사람이 되게 했다.

다행스러운 점은 홀로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비록 각자가 괴로움을 겪고 있긴 해도, 우리가 처한 상황은 우리 마음이 아니라 이 시대의 산물이다. 우리가 처한 상황을 진단하는 법을 배움으로써, 개인적인 차원에서 미친 것이라기보다는 전에 없이 강렬한, 사회적인 차원에서 생성된 격동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현대는 일종의 질병이며 현대를 이해하는 것이 그에 대한 치료법이라는 사실 또한 받아들이게 된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인생 책으로 꼽는다. 변방의 유인원인 사피엔스가 어떻게 지구의 지배자가 되어 지금의 문명을 이루고 살고 있는가에 대한 거대한 서사를 읽고 있노라면 ‘맞아, 나라는 사람이 사피엔스였지?’라는 자각을 할 수 있어 좋아한다. 하루하루 일상에 치여 살다 보면 잊고 지내는 것들이 있다. 나 역시 인류사의 어느 특정 시기를 살다가는 한 명의 사피엔스일 뿐이라는 사실도 그중 하나다. 이러한 자각은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이어진다. “그럼 너는 지구라는 행성에서 사피엔스로 어떻게 살다 갈 거야?” 이 질문 앞에서는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는 일상의 문제들도 별일 아닌 일이 되어 버린다. 지구상에 사는 한 명의 사피엔스로 나를 바꿔 놓고 보는 것만으로도 딴에는 큰일이라 생각해 종종거리는 일들이 작은 일로 축소되고 조금은 가벼워진다. '진짜 큰일 맞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사피엔스』를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는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이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이 세계가 어떻게 작동되고 있는지에 대해 유독 관심이 많아서인 것 같다. 나라고 해서 나를 다 아는 게 아니듯 이런 종류의 책을 좋아한다는 것도 최근에야 알았다. 이런 성향의 내게 알랭 드 보통의 『현대 사회 생존법』은 취향 저격의 책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은 인류사의 거대한 흐름 중 ‘현대’라는 특정 시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현대라는 시대 속 나를 자각하게 해 주는 책. 현대라는 사회는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현대 사회는 어떻게 작동되고 있는지, 이 시대 속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발견하게 하고 돌아보게 한다.


그럼 언제부터 ‘현대’라고는 부르게 된 걸까? 저자는 18세기 중엽 이후로 사람들이 자신들이 기존의 어떤 시대와도 근본적으로 다른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며 이 시대를 현대라 일컬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현대인들이 굉장히 불안해하고 행복하지 않은 이유가 현대 사회 자체가 질병이기 때문이며 이에 대한 치료법이 현대를 이해하는 것이라며 이 시대를 낱낱이 해부해 보여준다. 저자의 말 중 방점을 찍고 싶은 건 바로 “현대는 일종의 질병”이란 문장이다. 시대 자체가 질병이라는 말이 왜 이리 위안이 되는지. 내 탓도, 네 탓도 우리 탓도 아닌 시대 탓이라니! 가슴이 뻥 뚫리는 말에 속이 다 시원해진다. 이에 대한 치료법이 현대를 이해하는 것이라니 이 얼마나 명쾌한가?


현대라는 시대 속 사람을 이해하는 게 오히려 나를 포함해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데 더 나은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저자의 안내를 받으며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를 세세히 들여다보기로 했다. 나 또한 정체 모를 불안감으로 인해 괴로울 때가 많은데 이 불안의 이유와 근원을 아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일 것 같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은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문장을 골라 단상을 남기는 것이었다. 이 문장들을 곱씹으며 이 세계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편해지길 바라면서 말이다.

“현대성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신앙의 상실, 즉 신성한 힘이 일상에 개입한다는 믿음의 상실인 것이다. 현대 이전의 시대에서는 적어도 삶의 절반이 신 또는 영의 손에 달려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성을 통해 자연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의 에너지를 쏟고 있다. 신은 죽었고, 현대가 그를 살해했다.”

철학자 안광복 님은 옛날에는 내가 잘 안 풀린 걸 신의 탓을 해도 되었다며 나한테 원인을 돌리지 않아도 되니까 상대적으로 마음이 편했다고 말한다. 신이 이런 역할도 했었다니! 그런데 지금은 누구 탓? 오롯이 내 탓이다. 왜냐하면 지금은 자신이 받아 마땅한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모든 사람에게 신분 상승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체제인 능력주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능력주의가 과연 좋기만 한 걸까?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모든 사람에게 기회가 주어졌는데 왜 못했어요?”라는 질문이 아니 의문이 따라붙는 시대다. 나 역시 누가 뭐라 하지 않았는데도 가끔 이 말을 가끔 떠올리며 자책하곤 한다. ‘왜 이것밖에 못하냐고?’ 비단 나뿐일까? 이 질문 앞에서라면 대부분 위축되지 않을까 싶다. “실패가 평범한 일로 보이던 시절에 실패하는 것과 성공이 보편적인 가능성처럼 느껴지는 시대에 실패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라는 저자의 말처럼 실패로 인한 마음의 상처는 이전보다 지금이 훨씬 더 견디기 어려워졌다. 개인의 일은 개인의 책임이라고 가정하는 사회, 모든 게 오롯이 내 탓이라고 자책할 수밖에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시대정신에 맞서 전략적인 싸움을 하기 위해 두 가지 해결책을 제시한다. 현실에서는 그 누구도 영원한 패자 혹은 승자로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라는 점과 새로 사귄 사람들에게 직업이 무엇인지 질문하기보다는 최근에 어떤 생각이나 공상을 하고 있는지 물어보라는 제안이다. 능력에 관한 대화 말고 사람 자체에 집중하는 질문. 저자의 말처럼 시대정신에 맞서 전략적인 싸움을 하기 위해 주변 사람들에게 소소한 말 한마디부터 건네야겠다. “요즘 뭐에 관심 있어요? ”

“현대는 우리에게 모두가 평등하다고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설파한다. 모두에게 한없는 가능성이 기다리고 있다. 말은 참으로 관대하게 들리지만, 이는 사실 비교, 그리고 비교로 인해 야기되는 괴로움인 시기심을 초래했다. 모두가 누려 마땅한 것을 얻을 수 있는 세상인데, 어째서 우리는 더 갖지 못하는 걸까? 성공이 당연하다면, 어째서 우리는 계속 평범한 인생을 살아야 하는가? 점점 더 쉽게 물질적인 편의를 누릴 수 있음에도, 이른바 평범한 삶을 산다는 정신적 부담감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과중해지고 있다.”

비교로 인한 시기심 때문에 현대인은 옛날 사람들보다 훨씬 더 불행해졌다. 17세기 농부가 프랑스 왕 루이 14세에게 시기심을 품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현대인은 SNS를 보면서 “와! 이런 곳도 가네” 부러워하며 재벌 4세와 나의 삶을 비교한다. 비교를 통해 굳이 안 느껴도 되는 시기심을 느낀다. 비교군이 워낙 높은 곳에 있다 보니 자신의 평범한 삶에 만족하기 힘든 상황에 처해 있다. 평범한 삶을 산다는 것 자체가 정신적인 부담감으로 작용하는 시대라니! 그래서 다들 “저는 특별한 삶을 살고 있다고요.”라며 SNS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건가?

'현대는 분명 우리를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만들었는데 우리는 왜 불안해하고 행복하지 않은가?'라는 질문은 마음에 품고 사는 질문 중 하나였다. 이렇게나 잘 살게 되었는데 왜 다들 힘들다고 아우성인지 궁금했다. 이 힘듦의 실체를 알고 싶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조금은 해소되었다. 우리가 처한 이 상황은 이 시대의 산물이며 개인적인 차원에서 미친 것이라기보다는 전에 없이 강렬한, 사회적인 차원에서 생성된 격동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저자의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리고 여지없이 주어지는 질문. “그럼 너는 이런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살다 갈 거야?” 질문은 이렇게 오늘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짧은 이야기를 덧붙이자면 얼마 전 박사과정을 끝낸 지인의 딸이 난생처음 백수가 되었다며 굉장히 불안해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지인은 잠시 쉬는 건데 그렇게까지 초조해하는 딸을 이해할 수 없다며 “요즘 애들은 왜 이러는 거야?”로 이야기는 확대되었다. 그때 생각했다. 이 시대를 이해하는 편이 이 아이를 이해하는 데 더 나은 방법이 아닐까 하는. 아들과 딸이 마치 외계인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분명 같은 공간에 있지만,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 아이들을 이해하는 데에도 이 시대를 이해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을 오해하지 않기 위해. 이 아이들도 그저 현대라는 사회를 살아가는 나 같은 현대인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우리는 모두 현대에 거주하는 주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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