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의 말들) 버지니아 울프『자기만의 방』
“그녀에게 남성은 더 이상 반대당파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남성들을 맹렬히 비난하느라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녀의 감수성은 야외에 새로 심어 놓은 식물처럼 자기에게 와닿는 모든 광경과 소리를 마음껏 즐겼습니다. 또한 그것은 호기심에 차서 거의 알려지지 않고 기록되지 않은 것들 사이로 아주 섬세하게 퍼져 나갔습니다. 그녀는 여성으로서, 그러나 자신이 여성이라는 것을 잊어버린 여성으로서 글을 쓴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녀의 책은 성 그 자체를 의식하지 않을 때라야 생겨나는 그 신기한 성적 자질로 가득 차 있습니다.”(p.137)
“남자들은 대체 왜 그러는 거야?”
“누님, 그건 남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니까 누구나 그럴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운동 후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서른한 살 청년의 말에 아차 싶었다. 페미니즘에 관한 책을 너무 많이 읽었나? 아니면 스스로 피해자라는 의식이 내면화되어 나도 모르게 이 말이 입에 붙어버린 걸까? “여자니까 이래야 되고, 남자니까 이래야 된다”라는 뉘앙스가 비치기라도 하면 진저리 치게 싫어하면서 실상은 남자 여자 편 가르기를 하고 있는 내가 몹시도 거북하게 느껴졌다.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 걸까?
페미니즘 관련 책을 읽고 토론하는 횟수가 많아지면서 점점 남성의 반대당파가 되어갔다. 남성들을 맹렬히 비난하는 데 동참했다. 여성을 비하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높이려는 남성들의 말이나 행동을 숱하게 보아왔고 그런 말과 행동으로 인해 상처받거나 감정적으로 힘겨운 날들이 많았기에 쉽게 동참할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남성의 반대편에 서게 되었다. 그렇게 남성의 반대당파의 한 사람으로서 친정아버지는 물론 남편과 아들의 말이나 행동을 예의주시하기 시작했고 가부장적이지는 않은지 남성이라는 우월감에서 나온 말이나 행동은 아닌지 비난할 거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들 반대편에 서서 웃고 지나갈 일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고 별일 아닌 일도 확대해석 하다 보니 나는 항상 화가 나 있었다.
한편으로는 나를 세상에 있게 해 준 사람도 남자, 나와 함께 사는 사람도 남자, 내가 낳은 자식도 남자인데 그들이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적의를 내비치면서 화를 내며 사는 게 맞나?라는 의문이 들었다. 이렇듯 한 성을 다른 성과 구별하면서 사는 건 고역스러웠다. “어떤 계급이나 성을 뭉뚱그려서 비난하는 일은 불합리한 일이었지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그들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억제할 수 없는 본능에 휘둘리고 있으니까요. 그들의 교육은 어떤 점에서는 내가 받은 교육만큼이나 잘못된 것이었지요. 그것은 그들에게서 그만큼 큰 결함을 낳았습니다.”(p.64)라는 버지니아 울프의 말처럼 성을 뭉뚱그려서 비난하는 건 불합리한 일이었다. ‘그들도 나도 잘못된 교육의 피해자들이 아닌가?’라는 의구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친정 모임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엄마, 나, 여동생 셋은 “남자들은 대체 왜 그러는 거야?”라는 말로 대화의 물꼬를 트곤 했다. 남편들 때문에 그간 힘들었던 점들을 터놓고 이야기하다 보면, 같은 여성으로서 연대의식도 생기고 위안도 얻을 수 있었다. 여성 연대가 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이렇게 우리 안에 둥지를 틀고 서로를 보듬어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모임에서도 나는 여전히 남성의 반대당파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똑같은 패턴으로 반복되는 비난 퍼레이드에 지치기 시작했다. “아빠는 도대체 왜 그러시는 거야?”라며 추임새를 넣던 내가 매번 비슷하게 전개되는 엄마의 한탄과 푸념에 '또 그 이야기네. 오늘은 좀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라며 딴청을 부리기 시작했다. 비난할 만큼 비난해서 비난의 총량이 다 찬 걸까? 아니면 여성과 남성이라는 이분법적 구도에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한 걸까?
이 과정 또한 으레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였는지 모른다.
어느 순간 이렇게 누군가를 비난하는데 쓰는 시간들이 아까워지기 시작했다. 비난은 비난에서 끝나는 게 아니었다. 비난하는 마음을 가슴에 담고 일상을 사는 건 버거웠고, 좋지도 않은 감정 덩어리를 안고 살자니 날로 피폐해져 갔다. 가뜩이나 부정적인 말에 감정이 쉽게 요동치는 내게는 더더욱 힘겨운 날들이었다. “비난만 하다 죽을 거야?” 세상을 단지 남성과 여성으로 나누고 반대편에 서서 남성을 비난하는 데 더 이상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 만든 단조로운 세상에서 뛰쳐나가고 싶었다. 그들이 달라져서가 아니다. 부족한 자존감을 여성에게서 채우고자 하는 남성들은 과거에도 있었고 미래에도 있을 테지만 그들을 비난하느라 나의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머리를 쳐들기 시작한 것이다.
여성이라는 말에 진절머리가 났는지도 모른다. 갈 길도 바쁘고 나 자신으로 살기에도 바쁜데 남성과 여성으로 편 가르기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더 이상 남성 반대당파의 회원이고 싶지 않았다. 탈퇴를 해야만 “야외에 새로 심어 놓은 식물처럼 자기에게 와닿는 모든 광경과 소리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야만 여성이라는 것을 잊어버린 여성으로서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누구도 의식하지 않는 나만의 글쓰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항의하거나 설교하려는 욕구, 자신이 받은 모욕을 공표하거나 원한을 갚으려는 욕구, 세상을 자신이 겪은 곤경과 불만의 증인으로 삼으려는 욕구, 그 모든 욕구가 그에게서 불타올라 소진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시는 방해받지 않고 자유로이 흐르는 것입니다. 만일 방해받지 않고 눈부시게 타오를 수 있는 마음이 있었다면 그것은 셰익스피어의 마음이었지요.”(p.89) 내가 쓰는 글이 항의나 내가 받은 모욕을 공표하려는 욕구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흘렀으면 싶었다. 그 어떤 것에도 방해받지 않고 눈부시게 타올랐던 셰익스피어의 마음을 가지고 싶었다. 그래서 버지니아 울프가 말한 ‘가장 커다란 해방, 즉 사물을 그 자체로 생각하는 자유’에 이르고 싶었다.
이제는 성을 떠나 한 인간으로서 남편을, 친정아버지를, 아들을 보려 한다. 모두를 하나의 개별적인 사람으로 독립된 인격체로 보려 한다.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비난하는 마음이 사라지니 그 자리에 사물을 있는 그 자체로 생각하는 마음도 싹트기 시작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도 한층 넓어진 듯하다. 부족한 자존감을 여성에게서 채우고자 하는 남성들은 여전히 있지만 한 발짝 비켜서기로 했다. 하나하나 일일이 반응하고 신경 쓰는 데서 벗어나기로 했다. 티격태격하면서 싸우는 시간마저 아깝게 느껴졌다. “어차피 그들은 여성이 안 되면 다른 어떤 집단을 찾아내서 똑같이 행동할 거다. ”라는 어느 유튜버의 말도 이러한 생각을 하는 데 일조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서로의 대립을 조장하는 “남자들은 대체 왜 그러는 거야?”라는 말을 무심결에 내뱉고 있다. 습관이 되어버린 말이 물어온다.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마음먹었다고? 그게 그렇게 쉽게 되는 줄 알아?’ 당연히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한참 동안을 반대편에 있으면서 몸에 체화된 생각과 습관들이 쉽게 고쳐지질 리 없다. 하지만 시간이 걸린다고 해서 포기할 순 없다. 책장 한편에는 이러한 나의 바람이 담긴 한 권의 책이 언젠가는 읽어주길 바라며 기다리고 있다. “여성과 남성은 왜 각각 불행한가?”라는 부제가 눈에 확 들어와 주문한 폴린 그로장의 『가부장 자본주의』. 나만 피해자가 아니라 그들 역시 피해자일 수 있다는? 이 책에 내가 찾고 있는 또 다른 답이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더 이상 남성의 반대당파가 아닌 한 인간으로 살기로 했다. 그 어떤 것에도 방해받지 않고 눈부시게 타올랐던 셰익스피어의 마음으로 자유로이 흐르고 싶다. 야외에 새로 심어 놓은 식물처럼 내게 와닿는 모든 광경과 소리를 마음껏 즐기는 사람이 되고 싶다. 사물을 있는 그 자체로 생각하는 자유를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 이게 얼마나 큰 해방과 자유를 주는지 마음의 평안을 주는지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