톡 대화를 지웠고, 문자를 버려 그녀와의 첫 대화가 언제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2021년 11월 10일 쓰리룸 전세 계약서의 이름과 연락처로 나는 그녀를 처음 만났다. 이름과 연락처. 이 두 가지가 그녀에 대한 정보의 전부였고, 그 외의 정보는 필요치 않았다. 상가주택 관리자라고 언제나 세입자에게 소개를 하지만, 입출금 관리만 하는 경리일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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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입자들에게 하는 연락의 대부분은 상가건물 보수공사나, 엘리베이터 관리, 소방 관련 일정을 문자로 전송하는 것이다. 관리자가 세입자에게 하는 일방적인 통보. 세입자들과는 그렇게 연락을 시작한다.
신축 상가주택은 주택부분에 먼저 세입자가 들어오고, 상가부분은 그 이후에 임대가 나가는 경우가 많다. 인테리어 공사에, 더욱 협소해진 주차공간에, 조용하던 1층이 시끌벅적해지면 그때부터 세입자들의 항의 전화나 문자가 오기 시작한다. 주말이면 핸드폰을 무음으로 해놓기 시작한 이유이기도 하다.
201호와의 처음 대화는 보수공사로 인한 항의였다. 대화라고 해야 카톡과 문자로 주고받는 것이 다이지만. 부장님께 미리 보수공사 일정을 받았는데, 세입자들에게 공지하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소음이 크게 발생하는 공사라고는 생각 못했고, 낮에는 집에 사람이 없을 거라고 당연하게 생각한 것이 잘못이었다.
201호는 자야 하는데, 소음으로 잠을 잘 수 없다며 이게 무슨 일이냐고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날짜는 공지 못했지만, 보수공사를 하겠다는 문자를 한 번은 보낸 기록이 있어, 나 역시 당당했지만 미안했다. 잠못자는 것만큼 짜증 나는 일도 없으니. 당장 갈 곳이 있냐고 물었고, 201호는 알아보고 연락 준다고 했다. 갑자기 찾으려니 없다고 해서, 근처 모텔이나 호텔로 갈 수 있는지 물었다. 경비처리 해주겠다고. 그녀는 6만 원짜리 모텔 영수증을보내왔고, 2022년 06월 08일 세입자지원항목으로 이체했다.
짜증이 났으니, 공손하고 상냥할 리 없다. 201호. 누구냐 넌!
+ 이럴 경우 나는 제일 먼저 계약서를 본다.
계약기간 : 2021.11.10~2023.11.09 / 여/ 쓰리룸/ 1억 8천만/ 관리비 월 12만.
+ 그다음 통장거래내역을 본다. 월차임을 제 날짜에 납부하는지, 며칠 늦는지, 아니면 밀리고 있는지.201호는 전세로 관리비만 내고 있고, 단 한 번을 밀린 적이 없다. 단 하루도 밀린 적이 없다!
201호의 항의가 '짜증스러운 항의'에서 '당연한 항의'로 바뀌는 순간이다. 본인의 의무를 다하고 본인의 의견을 주장하는 것을 권리로 보고 있으니. 당연한 권리 주장. 할 수 있다. 암. 할 수 있고 말고. 관리자인 내 기준임 :)
+ 통장거래내역 스캔이 끝나면 카톡 프로필을 본다. 프로필은 많은 걸 보여주기도 하니까. 역광이지만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루프탑 수영장에서 봉긋한 가슴을 반쯤 담그고, 젖은 머리칼이 고슬고슬. 햇살을 받으며 저 멀리 응시하는 첫 프로필 사진. 역광이라도 분위기 있다. 늘씬한 몸매와 큰 키. 175cm?
감탄이 절로 나오는 바디라인이다. 코카콜라 몸매.헤어스타일이 바뀌었다. 허리까지 오는 찰랑찰랑 긴 생머리. 친구들은 구두를 신고, 본인은 맨발인데도 친구들보다 머리하나가 더 있다. 180cm 넘나? 비키니 하의가 티팬티처럼 생겼다. 핑클 옥주현이 이런 수영복을 입어 기사화된 것을 본 적 있었는데, 옥주현도 저리 가라 뒤태도 깜짝이다. 오메. 진회색 고양이 두 마리도 주인 닮았다. 도도하고 뚜렷하다.
'퍽셀' 무료이미지에서 다운로드한 사진. 아무리 찾아봐도 201호의 코카콜라 몸매와 그 분위기를 표현한 사진을 찾을 수 없었다. 그.나.마 비슷한 수영장과, 비슷한 수영복 사진.
201호는 여행을 좋아하고 호캉스를 즐기며 고양이 두 마리를 키우고 있다. 첫 프로필 사진을 올린 2016년 2월 이후 카톡 프로필을 처음 본 2022년 6월까지 남자친구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신이 내린 몸매가 안타까울 만큼 얼굴이... 그 어떤 옷, 명품가방, 필터로도 가려지지 않는 얼굴. 얼굴 때문인가. 남자친구가 없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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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냥하지 못한 세입자의 프로필을 매의 눈으로 스캔하며, 기웃거린다. 201호뿐 아니다. 숱한 세입자들 중 상냥한 세입자는 손에 꼽을 정도다.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를 볼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하긴. 좋은 일로 관리자에게 연락할 일은 없으니.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좋지 않은 상황이라도 기본은 지켜야 하는 것 아닌가. 사람마다 아무리 기준이 다르다지만, 기분이 태도가 된다고도 하지만, 윤리라는 것도 있지 않은가. 이건 관리자 입장이겠지. 퉤! 뭐라 해도, 201호는 내가 보기에도 근사하고, 우아한 삶을 살고 있다.
근데 왜 낮에 잠을 자야 하는 거지?
경비처리를 위해 지출결의서를 작성하고, 결재를 받으며 사장님께 사정을 말씀드렸다. 문자를 보내지 않은 내 잘못도 빠짐없이 얘기했다. 그래야 경비처리를 할 수 있으니까. 낮에 잠을 자야 하는 이유는 사장님께 들을 수 있었다.
201호는 3교대 근로자였다. 대기업 3교대 근로자. 나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교대근무. 내 주변에는 한 명도 없는 교대 근로자. 역시 우물 안 개구리는 나였다. 보여지는 것만 보며, 보여지는 것 이상으로 상상은 할 수 있는데, 내가 가진 시선 안에서만 볼 수 있었고. 내 상상은 머릿속 생각의 울타리를 넘진 못했다. 지식의 깊이는 얕아도, 지식의 넓이는 방대한 나이지만 지식 역시 내가 관심 있고, 내가 알고 싶고, 내가 기억해 두고 싶은 것만 쌓아둔다는 것을 또 한 번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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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상가가 인테리어 공사를 시작한 날과, 인테리어 공사가 진행되는 도중 소음이 유독 심한 날 201호는 어김없이 항의했고, 나는 그때마다 경비처리를 했다. 여전히 201호는 여행을 다니고, 호텔 야외수영장을 사랑한다. 그 좋아하는 수영장 사진에 얼굴은 조막만 하고 어깨는 근육으로 단단한 남자의 뒷모습을 올렸다. 연예인 사진인가 했는데, 남자친구였다. 도도한 냥이 두 마리는 단단한 근육맨의 팔에 매달려 있기도 하고, 키가 큰 201호와 201호보다 작은 남자친구는 마주 보고 웃기도 하며 알콩달콩 지내고 있다. 201호의 항의는 당연한 항의였고, 201호와 톡 채팅방이 열리는 날은 201호 프로필 기웃거리는 날이다.
역시 남의 삶은 재밌다. 나에게 201호는 '백조'였다. 물속에서 쉼 없이 다리를 움직이지만, 고고한 자태를 뽐내는 '백조'. 201호처럼, SNS에는 수많은 백조들이 산다. 톡 프로필,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카카오스토리. 등등등 타인의 순간을 볼 수 있는 공간은 많고, 우리는 그것을 쉼 없이 보고 있다.
보여지는 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과, 고통 없이 사는 사람은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나에게 타인의 삶은 그다지 큰 울림이 없다. 하지만, 어쩌면 찬란한, 어쩌면 멋있는, 어쩌면 제일가는 그들을 순간을 기웃거리며 파악하고 상상하는 일은 넘흐넘흐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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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호가 거주하는 주소지 건물 매매로, 이제는 201호의 항의는 받지 않는다. '벌어먹고 살아야지. 빌어먹지 않으려면_ 관리부 김과장'이라는 나만의 카테고리에 제일 먼저 201호와의 이야기를 올리며, 다시 카톡 채팅 창을 열고 프로필을 스캔했다. 비어있는 프로필 사진, '남자친구와 헤어졌나?' 지난 프로필에 여전히 남자친구 사진이 남아있는 걸 보니, 잘 지내고 있나 보다. 201호의 냥이 두 마리도 여전하고, 코카콜라 몸매는 헬스로 잘 유지하고 있다. 남친이 헬스 PT 쌤이 아닐까 유추해보기도 했다.
201호의 자기주장은, 나에게 까칠함으로 다가왔지만 단 한 번의 체납도, 단 하루의 지연납부도 없었던 201호는 여전할 것이다. 그것이 '당연한 항의'든 '본인의 성격' 이든. 딱 내 타입이긴 하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