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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이 Feb 13. 2023

나의 가난과 그리고 외로움 - 3

내면의 아이

 부모 그늘 없이 혼자 고군분투하다 정신을 차리니 어느덧 입시를 치를 나이가 되어 있었다. 나는 내가 대학을 가는 게 맞는 상황인 지 의문스러웠으나 한국에 계시는 아버지의 상황이 조금 나아진 덕에 베트남에 있는 현지대학에 서류는 넣어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 언론정보학을 공부해 기자가 되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베트남어가 아니면 다른 지원은 일절 해주지 않겠다고 했다. 무척이나 가난한 우리 집에서 내가 살 수 있는 길은 남들 다 하는 '공부'가 아니라 언어라는 '기술' 뿐이었던 것을 아버지는 아셨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현지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내 사정을 다 아는 전도사님이자 친구네 어머니께서는, 나를 집에 불러 친구와 함께 고등학교 졸업 축하 케이크를 불게 하셨다.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졸업 축하한다'는 말을 들은 나는, 그때야 처음으로 졸업이란 것이 누군가에게 축하받을 만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날 내가 '엄마'라고 부르는 전도사님은, "성인이 되면 미성년자였을 때보다는 생활이 어렵지 않을 거야"라고 하셨다. 나는 그게 어떤 의미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는데, 나중에서야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성인이자 대학생이 된 나는, 혼자 사는 것이 더 이상 부끄럽지 않은 일이 되었다. 고등학교 때는, 개학일마다 새로 만난 담임에게 찾아가 구구절절 내 사정에 대해서 설명해야 했다. "부모님은 이혼하시고 아버지와 둘이 삽니다. 아버지는 현재 한국에 계시고 저는 베트남에 홀로 남아 살고 있습니다", "학비와 급식비는 내기가 어려운 상황이라 전액 지원받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이 친구들에게 공공연히 알려지지 않았으면 하니 혹여나 노출되지 않도록 잘 부탁드립니다" 등등. 대학생이 되고 나니 당연하게도 많은 한국인 유학생 친구들이 자취를 하고 있었고, 더 이상 혼자 살아야만 하는 나의 복잡한 가정사를 들추지 않아도 되었다. 매년 신청해야 했던 학비 지원 프로그램에도, 수학여행을 가지 못하는 사유에 대해서도 적지 않아도 되었다. 돈이 드는 일은 그냥 '바쁘다', '일이 있다'라고 둘러대면 아무도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또 달라진 일은,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이었다면 진작 미성년일 때부터 알바를 해 용돈이라도 벌었겠지만 베트남에서 외국인 신분으로 내가 돈을 벌 수는 없었다. 설령 돈을 벌 수 있다고 하더라도, 당시 정규 노동자의 최저임금이 월에 100달러, 즉 10만 원을 웃도는 수준의 금액이었는데 그들과 동일하게 시급을 받는다면 나는 학비의 10분의 1도 모으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성인이 되자, 한국인 대학생을 필요로 하는 일자리가 있었다. 나는 한인마트나 한인식당에서 매니저로 근무하며 베트남 현지 직원들을 관리하고 교민이 하는 말을 직원에게 통역하여 전달하는 일을 맡았다. 시간이 지나서는 한국인 학생이나 주재원을 대상으로 베트남어를 가르치는 과외를 하게 되었다. 내 손으로 돈을 벌 수 있게 되면서 나의 생활은 조금씩 달라졌다.


 그러나 그렇게 긍정적으로 변화한 나의 상황과는 달리, 내 마음은 다소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 나는 술과 담배를 즐기고 유흥을 좋아하는 친구들과 가까워졌고, 그 친구들과 매주 어울려 놀았다. 그리고 아이러닉 하게도 일요일이 되면 습관처럼 교회에 나가 일주일 간 지었던 죄에 대해서 회개했다. 그렇게 회개와 반성을 마치고 나면, 그다음 주에도 어김없이 또 유흥을 즐겼다. '회개하면 모든 죄가 용서된다'는 기적의 논리로 그런 행동을 반복했던 것은 아니었다. 성경 잠언서에 보면, 죄를 반복해서 짓는 행위는 '개가 그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과 같다'라는 비유가 있다. 나는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도 계속해서 이러한 행동을 반복하였는데, 그 이유는 바로 '외로움'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철이 없어서 담담하게 받아들였던 사실들이 성인이 되고 나자 공허감으로 찾아왔다. 별다를 사춘기도 없이 어영부영 지나왔던 나의 학창 시절의 상처와 아픔들이 갑작스레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나이는 성인이지만 내면의 상처 가득한 어린아이는 시도 때도 없이 과거의 아픔을 복기하며 아파했고 그럴 때마다 나는 괜찮은 척하다가도 산산이 무너져 죽음을 간절히 바라며 울었다. 이런 나의 치료되지 못한 고통스러운 감정을 외면하는 가장 쉽고 빠른 도피처가 바로 유흥이었다. 오히려 반항 한 번 제대로 한 적 없이 어른아이로 컸던 나의 학창 시절과는 상반되고, 나이에 비해 성숙했던 이전의 모습에 대비해 퇴행하는 선택을 한 것이다.


 "왜 내 옆에는 아무도 없을까?"
 "왜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은 내 곁을 떠날까?"


 아버지와의 이혼 이후로 나를 영영 떠나버린 어머니, 새어머니와의 재혼 그리고 경제적인 상황 때문에 내 곁을 지키지 못했던 아버지. 어린 나를 두고 밭일을 나가셔야 했던 할머니와 그런 할머니를 기다리며 하루종일 티비만 봤던 내 유년시절. 종국에는 돌아가셔 내 곁을 영원히 떠나신 친할머니. 나를 억지로 맡아 돌봐주셨던 친척 어른들과 항상 말수 없이 집안의 왕따였던, 정서적으로 고립됐던 나. 내가 많이 의지했지만 어떠한 오해로 나를 등져버린 교회 목사님들과 사모님들과 집사님, 권사님들, 친구들... 외국에서 혼자 살아야 했던, 수없이 많은 어려움 속에 홀로 단칸방에서 버텨내야만 했던 어린 내가 느꼈던 그 외로움. 집채만큼 커져버린 마음속 외로움이 파도처럼 나를 집어삼키는 날에는 나는 차라리 죽게 해달라고 울며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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