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일 안에 결정지으리

마음 급한 연애

by 김혜진






한 남자를 만나고 있다. 이 남자, 알아갈수록 생각보다 더 괜찮은 사람임이 틀림없다. 본격적인 만남은 한 달이 지났고, 두 달 그리고 어느새 세 달째다. 만나는 동안엔 결혼이니 부모님이니 나이니 뭐니 뭐니 하는 옆길 생각 않고 그저 즐거운 만남에만 집중하리라 했다. 그런데 시간이 너무나도 잘 간다. 각성하듯 정신 차려야지 하는 마음이 생겨난다. 쫓기듯 점점 조급해하고 있는 내가 있다.




나이를 시작으로 숫자 계산을 해 본다.




서른일곱 - 연애 최소 일 년은 해야겠지? 서른여덟 - 결혼을 하게 되면 여덟인가. 아니지 만에 하나 혹시라도 헤어지게 되면? 서른여덟에 또 연애 상대를 찾아야 하는데 그렇다면 난 서른아홉이 되는 건가? 마흔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 누구랑 연애를 한담. 어디서 찾는담. 못해 못해, 안 해. 안 한하고 만다. 계산은커녕 생각하기도 싫어진다.









나는 지금 어떻게 뭘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의 끄트머리에 다다른 느낌이다. 학교 과제하듯 다음으로 해야 할 것을 생각했고 이내 떠올랐다. 드디어 큰 용기를 내보려고 한다. 사귀게 된 지 3개월 만의 일이다.




상대의 입장을 모두 고려하기엔 내가, 지금의 내 나이가 허락하지 않기에, 너무 앞선 느낌은 있으나 별 수 없다. 고민의 고민을 거듭하였고 이제는 오늘은 준비한 말을 꺼내려한다. 후우- 세 번의 숨을 크게 쉬었으나 말하기에 앞서 어쩌나 또다시 고민이 되고 만다. 좀 더 지내보고 생각하자 싶다.




한 달이나 흘렀을까. 맨 처음 생각한 대로 누군가를 만나거든 적어도 90일 안에는 결정을 지으리 맘먹었건만 지금의 관계가 충분히 즐겁고 소중했기에 잠시 묻어두기로 했다. 그렇지만 언제까지고 미룰 수만은 없었다. 마음에 계속 들어차있는 무거운 고민을 툭 꺼내놓기로 했다.







"결혼 생각해 봤어? 할 거야?"


잠시 말이 없다. 대답이 느리다. 그리고선 내 귀에 들려온 한마디.



"아직 준비가 안 돼서..." 말 끝을 흐리는 대답이다.



"어? 어.. 그래." 하고 지나는 농담이었다는 듯 나 또한 짧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농담은 무슨 농담. 가벼이 던진 말처럼 했지만 아니었다. 그날 저녁 집으로 오는 길에 눈물이 뚝뚝 정말이지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 와중에 왜 이런 눈물을 닭똥 눈물이라고 일컫는지 알겠네 싶었다. 닭똥은 이해가 가건만 이 남자의 대답은 그리 쉽게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아직 그 정도는 아니었구나, 그럴 마음이 없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갖가지 나름의 해석만 하게 되었다.









머릿속이 복잡하거나 몸이 찌푸둥하다 싶으면 시야가 트여있는 한강으로 가곤 했다. 오랜만에 조깅을 해보려 나왔건만 한강물을 바라보니 뛰고픈 마음이 사라진다. 그냥 좀 걷다가 멈춰 앉아 강만 바라봤다. 하염없이 멍하게 바라보는데 뚝뚝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이게 뭔가 싶어졌다. 머릿속 생각들이 복잡하다 못해 뒤엉켜간다. 천천히 풀어보려는데 금세 또 얽히고 섥힌다. 안 풀린다. 못 풀겠다.




어디서부터 무슨 생각을 해야 하나 하며, 지금의 상황을 한번 나열해 보기로 했다.




첫 번째는 역시나 나이다. 서른일곱. 실감해야 하는 지금의 내 나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나 보다. 이놈의 결혼 나이. 누가 정한 것인지 도통 모르겠으나, 결혼이 목전에 와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 나의 두 번째 상황은 결혼이다. 아무나와 만나는 것도 그 아무나와 결혼을 하는 것은 더욱이나 있을 수 없지 말이다. 보여주기식 만남과 결혼은 어차피 백퍼 이혼각이다. 그보다는 맘 편히 혼자 살아가리라 이미 생각했든 바다. 논점에서 벗어나고 있다. 다시 다시...




서른일곱 살의 나는 내 일을 무척이나 자랑스럽게 여기는 커리어 우먼이다. 나는 왜 지금 여기에서 울고 있나. 무엇이 나를 울적하고 여린 생각을 하게 만들었나. 벚꽃 흩날리는 계절이 지난 지금 난 왜 이러고 있어야 하지. 하며 한참을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가 문뜩 춥다. 하며 몹시도 찬 기운을 느꼈다. 그리고 뚝뚝 흐르던 눈물은 어느새 펑펑 흘리는 눈앞이 보이지도 않을 눈물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나 지금 뭐 하는 거람, 하는 생각이 들어 잠깐 멈추다가도 또 눈만 감으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더 이상은 내 의지와 상관없는 눈물 같다.









지지지 직 진동으로 해둔 전화가 울린다. 내려다보니 "준비가 덜 되었다" 말하던 그 남자다. 안 받았다. 걸려오는 전화를 안 받기는 처음이지만 받고 싶지가 않았다.




다시 울린다. 아니, 내가 안 받을 이유가 뭔데 싶어져 서너 번 더 울린 후 받았다. 받긴 했는데 말이 안 나온다. 수화기 너머 왁자지껄한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왔고, 즐거운 목소리로 회식 중인데 먹기 싫은 술 먹고 있다면서 어디냐고 물어 온다. 한강.이라고 겨우 대답을 했다. 한강에서 뭐 해? 운동? 하며 묻는다. 어. 하고 답하는데, 이상함을 감지한 건지 평소보다 말이 많아진다.




그다지 할 말도 없기에 그냥 듣다가 더 듣지 않아도 되겠다 싶어져 '끊을게' 했고, 끊었다. 다시 전화가 왔으나 내버려 뒀다. 받지 않았다. 문자가 왔고 어디 쪽이냐며 내가 있는 데로 오겠다 한다. 후우-




바람 쐬고픈 만큼 쐬었다 싶어 집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한강변 도로에서 택시 한 대가 멈춘다. 직감으로 설마? 혹시? 했는데 설마가 역시로 변신하는 순간이 내 눈앞에서 펼쳐졌다. 영화니 드라마니 싶은 바로 그 장면 그대로였다. 아주 잠깐 동안이지만 영화 속에 빨려 들어온 느낌마저 들었다.




술 한 잔만 먹어도 얼굴이 새빨게지는 이 남자는 회식자리에서 안 마실 수가 없었다며 첫 말을 꺼내더니 이런저런 말을 한다. 하는 얘기가 안 들린다. 그닥 듣고 싶지가 않았지 싶다.




이상함을 알아채서 택시 타고 곧장 온 사람인데 무시하며 가는 건 아닌 것 같아서 아무 일도 없던 척하며 커피나 마시자 하고 카페 엘 들어갔다. 들어가선 주문도 잘하고 아늑한 창가 자리에 앉았건만 이런. 아뿔싸 눈물이가 인사하러 나온 건가.. 꾹 참았던 울음보가 터지고 말았다.







난처해하는 남자
그저 하염없이 우는 여자







따뜻한 물을 마시라며 가져온다. 마셨다. 천천히 호흡하였고 진정이 되었기에 말을 했다. 최대한 머릿속 생각들을 정리하였고 입 밖으로 모두 꺼내놓아 보자 했다. 가끔 눈물이 다시 또 나오곤 했지만 천천히 그렇지만 모든 이야기를 해보자 했다.




그날 이후 그러니깐 '준비가 덜 되어서'라는 말을 들은 후로 줄곧 마음이 편치 않았다는 것. 맘이 불편하니 생각도 많아지더라는 것. 골똘히 생각을 하다 보니 내가 아니어도 좋은 사람 얼마든지 잘 만날 텐데 하는 생각이 들더라는 것. 나는 내 나이를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더라는 것. 급하게 마음먹기는 싫지만 현실을 나 몰라라 할 수만은 없다는 것. 확실치 않은 관계를 계속해가는 건 부담스럽다는 것. 등등.









가만 듣던 남자는 이내 진지한 표정을 짓더니만 내 얼굴을 본다. 그리고선 들을 준비가 된 나를 보더니만 한 가지 질문을 한다. 질문과 동시에 대답도 한다.




"나랑 헤어질 수 있어? 나는 안 헤어질 건데."




내 앞에 앉아 있는 남자의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눈물이 맺힌다. 나만큼은 아니지만 우는 남자를 보고 말았다. 티슈로 바로 닦더니 이어 설명하듯 말을 한다.




준비가 안되었다, 하고 말한 건 말 그대로 준비가 덜 되어서라고. 회사 입사한 지 얼마 안 되었기에 결혼자금 모아둔 것이 없다고. 그래서 그렇게 말을 한 거였고 나의 나이에 대해서는 문제 될 것 하나 없다며 같은 삼십 대이지 않느냐 한다.




겨우 웃음이 새어 나왔다. 울다 웃다 웃다 울다.... 그날 저녁 한참을 되돌이표가 되어 오작동하던 내 감정들이 기억난다.




나도 헤어질 맘은 없어, 하며 대답했고 우리 둘의 오해 아닌 오해 이야기는 여기에서 마무리되었다. 결혼을 전제하고 만난다는 것은 서로에게 부담이 될 거라 생각 들었다는 말도 해 주었는데, 나 또한 처음 이 남자 만나봐? 하고 고민하고 생각했던 때에 똑같은 마음이었다. 결혼이란 것 잊고선 즐겁고 재밌게 만나보자. 그러다 맘이 통하고 많이 많이 좋아지거든 그다음에나 진지한 대화를 해 보자 했었지 말이다.





가만. 가만 보자, 그렇다면 나 혹시 이 남자한테 진지해진 건가?





그렇다. 나는 이 남자가 좋았고, 좋은 만큼 함께하고 싶어 졌고 동시에 조급해진 마음이 표현되었지 싶다. 혼자만의 고민을 이야기했고 잠깐의 시간을 갖고 생각했고, 결국은 헤어질 마음 없다는 한마디에 요동치던 내 머릿속 수많은 탱탱볼 생각들도 모두 가라앉았다. 마음의 갈피를 붙잡아준 그에게 고맙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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