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가 시작되다
스며들듯 시작된 만남은 매일같이 우리를 옆 동네로 옮겨놓는다. 골목 여기저기를 공원 산책하듯 언제고 손을 잡고 걸었다. 피가 뜨거운지 심장이 뜨거운지 쌀쌀한 날씨엔 이 남자의 손이 제일이다. 반면에 더워져가는 계절엔 맞잡은 두 손에서 살짝 땀이 난다. 그럼에도 우린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들으며 두 손 꼬옥 마주 잡고 보폭 맞춰 걷고 있다.
서른일곱 이제 막 시작된 나의 연애 이야기다.
일과 운동 그리고 친구들이 전부였던 삼십 대의 나에게 드디어 멀쑥한 한 남자가 불쑥 내 앞에 나타났다. 심지어 이 남자, 나보다 일곱이나 어리다. 친구들에겐 소리 높여 말하고 엄마 아빠에겐 당분간 절대 비밀이다.
부모님께 꼭꼭 숨겨야 할 주민등록번호를 갖고 있는 이 남자는 워낙에 어른스러움이 몸에 배어있는지라 만나는 내내 나이차가 특별히 느껴지지는 않았다. 다만 이런 건 있었다. 나의 피부 상태며 옷매무새며 한 번 더 확인하면서 어떻게 보일까 하는 타인에 대한 의식도 없잖아 있었다. 문득문득 이래도 되나 싶기도 하고 그러다 그런 것쯤 뭐 어떤가, 싶기도 하고 마음이가 왔다 갔다 하길 이어졌다. 에브리바디 친구 마인드가 있어선지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로는 이 복잡한 생각들은 의미 없다로 결론이 났고 우선은 편히 만나보며 즐겁게 지내자에 초점이 맞춰졌다.
특별한 호칭이 없던 우리는 어느새 서로를 '자기야'라고 부르게 되었고 그러자 한층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난생처음 불러보는 호칭이었다.
서로의 친구들을 만나 얼굴을 익히고, 함께 식사도 하고 수영장도 다니면서 서서히 친해져 갔다. 회사 친구들과 직장 상사들은 만나는 남자를 두고 전생에 나라를 구했냐며, 한 나라를 구한 것도 아닌 것 같다며 하나같이 진심 담아 축하를 해 주곤 했다. 나를 롤 모델로 삼겠노라 말하던 후배들의 이야기에 얼굴 빨개지며 손사래 치던 때가 생각난다.
수영이 취미인 이 남자는 퇴근 후엔 수영장을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주말은 어김없이 테니스를 친다. 코트장에선 테니스코치님이 되어 테린이들을 위해 카트 한가득 박스볼을 쳐주기도 하고 드라이브 자세 교정도 하나하나 봐주며 직접 시범도 보여준다. 모두가 실력 늘면 다 같이 더 즐거울 수 있으니 한다며 본인을 위한 시간이 아님에도 무척 진지하고 적극적이다. 이 모습을 보며 성실한 사람임을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동호회 모임에서 간식으로 먹은 군것질 주전부리 봉지들이 여기저기 즐비하다. 땅에 떨어져 있는 작은 쓰레기들마저 줍고 뒷정리를 한다. 다른 사람의 것까지 마다않고 끝까지 깨끗하게 치운다. 매번 변함없이 행동하는 모습을 보고선 참 착한 사람이구나 싶었다.
주변 사람들과 하는 이야기의 주제가 무엇이건 간에 고개 끄덕이며 잔잔하게 웃으며 언제나 잘 듣고 있음이 보였다. 친절하고 상냥한 예의 바른 사람 - 그의 첫인상이다.
영화를 보고 밥을 같이 먹고, 하루 있었던 일과를 공유하면서 둘만의 데이트가 이어졌다. 주말에는 어김없이 팔과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테니스장에서 살았다. 강 건너 가까이에 살고 있기에 한강 자전거데이트를 하기도 했다. 자전거를 타고선 여의도 불꽃놀이도 눈앞에서 보고 헤어지기 싫어 밤늦게까지 이마트 데이트도 하면서 말 그대로 꽁냥꽁냥 데이트를 많이 했던 듯하다.
다만 우리는 다른 커플들과는 눈에 띄게 다른 점이 한 가지 있었다
다툼이 제로다. 서로 간에 말다툼이 없다. 싸움이 없다. 흔히들 좀 더 만나다 보면 으레 다투게 되어있다느니 말하곤 한다. 안 다투는 남녀가 어디 있느냐며 얘기들을 한다. 어떻게 안 싸우냐며 하나같이 말한다. 그런데 있다. 여기 있지 말이다. 싸우지 않고도 얼마든지 좋은 관계 돈독한 관계 유지가 분명히 가능함을 알게 되었다.
한 번은 직접 물어본 적 있다. 우리는 왜 다투지 않는 걸까 하고. 묻는 나를 의아해하며 대답하길 다툴 이유가 없는데,라며 물음에 마침표를 찍는다.
연애하며 다투는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서로의 의견이 부딪혀 각자의 주장을 펼치다가 받아 들음에 흡수가 안되어 그럴 수도 있고, 내 생각 내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는 답답함에 마음과는 다르게 험한 말이 나오기도 할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나의 경우, 우리의 경우는 어떠했나 가만 생각해 본다.
의견이 다를 경우에는 상대의 말을 듣는 게, 끝까지 들어보는 것이 먼저였지 싶다. 가만 듣다 보면 들으며 생각을 할 수 있고 또 궁금한 것을 묻기에도 대답하기에도 수월해진다. 그렇게 듣다 보면 '그래서 그렇구나' 하고 생각 외로 이해되는 것들이 많았다. 1분 그저 60초만 기다리면 된다.
그럼에도 이해가 안 되고 수긍이 안될 때는 내 의견을 정확하게 말했다. 그리고 혹여 그럴 경우가 있을 때면 언성을 낮추곤 말을 했다. 끝 말을 낮추어 말을 하다 보면 서로 간의 하고자 하는 말이 뚜렷이 잘 들린다. 이야기가 오고 가게 된다. 다툼과는 거리가 먼 두 남녀의 감정을 배제한 어른스러운 대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상대 이야기 듣기의 기본 중의 기본은 '그렇구나, 그래서 그렇구나'라고 한다. 금쪽이 오은영 선생님이 항상 강조하시는"상대방의 마음 알아주기" 작전이다. 듣고 수긍하고 난 뒤 그다음의 순서가 내 의견이고 내 주장이고, 내 말이지 싶었다. 그리고 이 남자는 나보다 더 뛰어난 전술가였다. 언제고 이 사람의 말에 더욱 귀 기울이게 되는 마력이 있었다. 회사에서 일어난 감정 섞인 스트레스를 이야기를 소리 높여 시작하다가 어느새 차분해지곤 하는 나를 발견했다. 그리고 이야기가 끝날 때면 별거 아닌 일들이 되었다. 웃고 넘기며 우리 얘기나 하자가 되었지 싶다.
만나며 상대에게 무언가를 특별히 바랄 것도 없었다. 만남 속에서 자연스레 서로를 위한 마음이 생겨났고 관심 있고 좋아하는 사람이기에 리스펙트 되며 존중을 하였지 싶다. 통통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나에 비해 무척이나 침착한 편이었기에 그의 선한 영향을 스미듯 지속적으로 받았던 듯하다.
어쩌면 지나친 음주를 하지 않는 것과 담배를 피우지 않았기에 소소한 사건들로 인한 다툼이 원천봉쇄되었지 싶기도 하다.
서로 간의 연락에 있어서도 자유로웠다. 갑작스러운 회식으로 약속이 어긋나도, 혹여나 연락이 안 되어도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면 그럴 수 있겠거니 생각하였다. 회사일로 바쁠 때도 그러려니 하였고 문자에 바로 답장이 없어도 이유가 있겠지 하며, 글자 그대로 "그러려니" 생각을 했던 듯하다. 내가 그러했던 것처럼 이 남자 또한 같았다.
연락이 오지 않는다 한들 대수롭지 않았고 내가 하면 되었다.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그 자리에 집중할 수 있어 되려 좋았다. 배려로 느껴졌다. 몇 시에 들어갈 것이냐, 왜 전화를 안 했냐, 도대체 얼마나 마신 거냐, 누구누구랑 같이 있었느냐 하는 추궁도 질문도 없었다. 나에게 관심이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보다는 이런 점들로 인해 상대에게 신뢰가 차츰 더 쌓이고 믿음이 깊어져갔지 싶다. 서로 간의 이해가 기대 이상으로 두터웠기에 사소한 언쟁이나 다툼이 생기지 않았던 건 아닐까 한다.
고마운 마음 가득이다.
내가 나로 있게 해 준 것에 고맙고
이해해 주고 믿어줌에 고맙다.
조용하고 침착함의 끝판왕이던 이 남자는 하루하루 지날수록 웃는 모습이 늘어났고 환하게 웃을 때가 제일 좋았다. 듣기만 하던 것에서 주도적으로 하는 이야기도 늘어갔다. 원래가 그런 건지 서로의 영향 때문인지 둘 다 조금씩 완성도 있게 다듬어졌다. 마치 영양소 배분하듯 각자의 장점은 서로에게 나눠주고 단점은 보완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알게 모르게 어느새 톱니바퀴처럼 너무나도 잘 맞춰진 사이가 되어가고 있다.
서른일곱이라는 나이가 되어서야 내가 나다워짐을 오롯이 느끼며, 이토록 편안한 마음이 되다니. 하루 지나 또 다른 하루가 올 때마다 좋아하는 마음이 커져만 가는 사람을 만남에 꿈만 같다. 이래도 되나 싶은 순간들이다.
서른일곱과 서른. 서른과 서른일곱이 이렇게나 잘 융화될 수도 있구나 싶다. 알고 보니 신의 뜻으로 만난 우린가 싶고 운명인가 싶어 진다. 삼십 하고도 원 투 쓰리 포, 파이브 식스 앤 세븐 - 서른일곱의 나. 하늘이 허락한 이 남자와 빠르게 깊은 연애 한번 시작해 보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