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남자 내 남자 해도 될까요

서른일곱 여자의 다짐

by 김혜진








한창 일할 나이 그리고 한참 연애할 시기 - 모든 게 다 때가 있다고 한다. 그때가 이제 내게도 오려나보다.




'집에서 삼십분 정도, 모임 인원은 열명 안팎. 그리고 주말 오전으로 하고 나이대는 2030이 좋겠다.' 인터넷만 되면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검색해 찾는 게 가능하다. 희망하는 조건을 모두 갖춘 동호회를 찾아보기로 했다. 자전거, 수영에도 관심이 있었지만 좀 더 실력이 늘고 싶은 테니스가 최우선 순위였다.




회사 휴직하고 일 년간 머물렀던 텍사스 오스틴에서 테니스를 처음 접해본 이후 테니스 매력에 푹 빠졌었더랬다. 맘에 쏙 들어 한국에 들어와서도 꾸준히 해오다가 레슨도중 어깨를 심하게 다치는 바람에 일 년여 쉬었고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기에 움직일 때가 왔다 싶었다. 테니스는 혼자서 할 수 없는 운동이기에 동호회 가입은 필수였다.









장갑을 끼지 않으면 손이 시리던 초겨울 즘 이였을까. 편의점에 들러 따뜻한 커피 캔을 한가득 사들고 인터넷에서 찾은 동호회 코트를 찾아갔다. 봉지를 든 손은 그새 얼었는지 새빨갛다.




혼자서, 생판 모르는 모임에 간다는 건 어색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테니스의 특성상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빨개진 손만큼이나 수줍고 낯설지만 인사를 나눠야 한다. 이름을 말하고 구력을 말하고, 나이는 삼십 대 중반으로 밝혀본다. 이어서 묻는다. 서른 몇 인데요? 별수 없다. 다 밝혀야 한다. 여기는 한국이지 말이다.




서른여섯이요.




분위기 살짝 싸하다. 알고 보니 이십 대가 대부분이고 삼십 대는 한두 명인 동호회 클럽이었던 것이다. 뭐 어쩌겠나, 테니스를 쳐야 하기 때문에 그래도 어울려봐야 한다. 어색하던 인사도 끝나고 코트로 들어가 랠리를 하고 시합도 해본다. 연둣빛 공을 보니 신이 나고 코트에 와 있음에 기분이 좋아진다. 파트너와 파이팅을 외치며 힘을 내고, 서브가 원하는대로 잘 들어가고 백핸드 드라이브가 제대로 들어가 포인트를 얻고 발리가 정확히 성공하니 즐겁기 그지없다.




그 다음 주에도 게스트로 한 번 더 갔고, 그 다음 주에도 한 번 더 갔다. 그리고 가입을 하기로 했다. 오랜만에 새로운 동호회가 생겼다.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건만 운동이라는 매개로 같이 시간을 보내니 즐겁기 그지없다. 이런게 운동의 묘미인가 보다.





그리고, 그 안에 한 남자가 있었다.






모자가 잘 어울리던 그 남자는 동호회클럽에서 가장 공을 잘 치는 에이스이기도 했다. 큰 키에 다부진 몸매에 남자든 여자든 누구에게나 친절한 그런 사람이었다. 일이 바쁜 건지 개인사가 많은지 언제나 전화 통화를 자주 하던 게 기억난다. 그런가 보다, 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려는 즈음, 여전히 꽃샘 추위가 이어지고 있다.




토요일이 되었고 테니스를 쳤고, 한주가 지나간다. 어찌 지나가는지도 모를 한주가 또 지나고 다시 토요일이 된다. 어김없이 테니스 모임에 참석했고 사람들과 어울렸다. 어느 날엔가 정모 겸 회식을 하게 되었다. 술 마시는 자리가 두런두런 이야기보다도 점점 술위주가 되다보니 그만 일어서자 싶던 순간, 조금 멀직이 앉아있던 모임의 에이스 (닉넴) 양군도 때마침 일어나려 한다. 서로 눈이 마주쳤고 밖에서 만나자는 무언의 말이 오간 후 한 사람씩 휘리릭 나왔다.




후우- 나오니 숨이 좀 트인다. 모퉁이에 파란 자전거와 함께 서있는 양군이 보인다. 반가운 마음에 손을 흔들었고, 웃었다. 이대로 갈 거냐는 말을 걸었고 그 말이 같이 맥주 한잔 마시자는 말임을 바로 알아채주고 아는 데가 있다며 가자 한다.









튼튼해 보이는 파란 자전거가 눈에 들어온다. 이 자전거로 집과 코트를 오가며 다닌다고 한다. 그렇구나, 하며 숯불치킨이 메인메뉴인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말 그대로 맥주 한 잔씩 마시며 즐겁게 얘길 나눴다. 워낙 차분한 듯해서 서울 아니면 충청도 사람인 줄 알았는데 전혀 다른 곳에서 왔다는 것과 혼자 자취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대학시절 동아리에서 테니스를 시작했다는 것과 회사 퇴근 후엔 수영을 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말하는 동안 얼굴이 새빨개져서 물으니 술을 즐기지않고 잘 못한다고도 한다. 담배는 안 피운다 하고 그리고 만나는 여자는 없다 한다.




(이 사람 뭡니까. 알고보니 딱 내 타입이잖아)




막차가 다니는 시간까지 이야기를 하고서야 밖으로 나왔다. 바람도 세차고 공기가 꽤 차다.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찬바람 피해 등 뒤에 서있다 보니 살짝 두근 하다. 잘 가라는 인사하며 차를 타고 집으로 오는 길, 두근거림을 느낀 나 뭐지 싶었다. 살려둔 연애 세포 몇 개가 꿈틀꿈틀 스트레칭 하고 있음을 순간적으로 알아챘다. 고마운 내 세포들.










어김없이 또 주말이 왔다. 새삼 반가운 얼굴도 보인다. 열심히 박스볼을 치고 랠리를 하고 시합을 한다. 코치님 같은 모습을 보니 새삼 훈훈하다. 오전 모임이 끝나면 점심이고 배가 몹시 고팠음에도 다들 주말이라 바쁜지 밥 먹고 갈 시간이 없다 한다. 그렇게 모두들 가고, 나와 이 남자만 남게 되었지 말이다. 어라, 둘이서만? 싶었지만 뭐 어떠리. 밥인데. 배고파먹는 끼니 밥인데 넷이든 둘이든 혼자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밥 먹으러가자 했다.




걷다 보니 갈비집이 눈에 보였고 들어갔다. 오늘 점심 식사는 소갈비다. 코트에서 초보자 레슨 해주듯 친절히 알려주는 것에 고마운 마음이 있었기에 기꺼이 내가 사기로 했다. 둘이서 먹는 숯불갈비는 난생처음이다. 고깃집은 가족 아니면 회식이지 누군가와 둘이서 먹으러 들어온 적은 이제껏 없던 경험이었다. 그럼에도 그닥 어색하지 않고 즐거웠다. 게다 정말이지 너무 맛있었다.




평일 저녁, 일찍이 퇴근한 날 핸드폰이 울린다. 카톡이다. 메시지를 보니 이제 퇴근한다며 저녁 먹었냐 묻는다. 퇴근하자마자 얼마나 배가 고픈데, 당연히 저녁은 먹었다. 메시지에 빠르게 답장을 쓴다 - 아니, 아직.




저녁을 함께 먹고 진심 배불러 같이 걷기로 한다. 걸어야만 한다 배가 얼마나 부른데. 여기저기 동네를 걷고 걷고 또 걸었다. 공원도 걷고 옆 동네까지 가서 또 걷는다. 서른일곱의 봄, 난 참 많이도 걸었다.




주말이면 테니스를 함께하고, 평일 저녁은 산책하며 시간을 함께 했다. 썸인지 사귀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간 건 확실하다.









한 달 두 달 즘 지났을까 추운 바람이 지나가고 있다. 밤공기가 차가움에서 시원함으로 변했다. 저녁 산책을 하던 길에 팔짱을 꼈다. 껴봤다. 가만있는다. 팔짱을 끼고 걸었다. 어색하지만 어색하지 않은 척 그러다 보니 어느새 어색함이 점차 옅어진다.




시간이 흘러 팔짱은 두 손을 잡게 되었고, 손을 잡고 걸으니 이 남자, 내 남자가 되는 것만 같았다.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뭐 어떠리 했다. 마음 가는 대로 꾸밈없이 나오는 대로 행동했다. 어색함도 잠시 이젠 자연스러움이 생겨났다.





밥을 같이 먹고, 어김없이 길을 함께 걸으며 산책을 하고 차를 마셨다. 둘 다 술을 즐겨 하지는 않기에 (난 회사에서 마시는 회식 술로 충분했다) 보통은 술보다 차를 마셨고, 걸음걸이 맞춰가며 이런저런 하루일과며 시시콜콜 뭐든 이야기하며 걷곤 했다.




이야기의 대부분은 본인이 즐겨 하고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대학 때부터 지금껏 수영을 좋아해서 계속하고 있다는 얘기, 외국은 나가본 적이 없지만 가보고 싶다는 얘기, 서울에 살게 된 계기와 학창 시절 이야기가 대부분이었지 싶다. 그리고 내 이야기 하나하나에 리액션하며 참 잘 들어주었다.




회식이 잦던 때라 끝나는 시간에 맞춰 기꺼이 데리러 와주던 어느 날이다. 수영 끝나고 오는 길이라며 어깨에 맨 오리발이 귀여워 보였던 그 날, 회사 근처 단골 카페 사장님과 친한동료 두어명과 합석을 하게 되었다. 모두들 준비라도 한 듯 물었다, 둘이 무슨 사이냐고. 난 제 3자인것 마냥 아무말않고 무어라 대답할지 두 귀 쫑긋하고 있었더랬다.




카페 사장님 : 무슨 사이에요? 두 분은?

양군 : (말없이 머슥 웃는다)

카페 사장님 : 남자친구인 거예요? 서로 무슨?

양군 : .... 애인이죠.




애인? 애인?! 두 귀를 의심할 정도의 대답이 나왔다. 나에게 애인이 생긴 순간이다. 오마이갓 애인이라니. 여자친구죠,라고 대답하려나 했는데 딱 두글자, 애인이란다.




애인이라는 말에 이렇게까지 놀란 이유는, 서로 사귀자 라거나 사귀는거다 라는 말이 오가지 않았다는 것과 나에게 있어 애인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가 좀 남달랐기 때문이다. 애인은 사귐에서 한 단계 앞서있다고 생각이 들어서다. 애인은 결혼할 사이에 부르는 호칭이라고 생각했기에 꽤나 놀랬었다.




서른하고 일곱의 봄

내 앞에 나타난

애.인.




이 남자, 내 남자 해도 되는 건가. 이미 내 남자인 건가. 그동안 살짝 아리송했는데 애인이라는 대답에 결론지었다. 이 남자는 이제 내 남자다,라고 확신을 갖기로 한 것이다.




말을 할 때면 신중하고 나이답지 않게 무척 어른스럽고 뭐든 열심히인 사람. 성실한데다 누가봐도 착한 사람. 술에 약하고 담배는 피우지 않는 남자. 크게 재밌지는 않지만, 내가 하는 얘기마다 귀 기울이고 진심 즐겁게 웃는 남자다.




내 나이 서른일곱,

내 남자 서른.




드디어 우리의 연애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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