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도 나도 매일 마다 다시 시작할 수 있어요
완벽주의자가 많은 나라 대한민국이지만, 인간이기에 모두 완벽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슬프게도 우리나라의 행복지수가 낮고 자살률도 높은가 봅니다. 완벽하려면 둘 중 하나는 무조건 겪어야 하니까요. 완벽을 기하기 위해 나 자신을 괴롭히거나, 완벽하지 못하기에 괴롭거나, 혹은 완벽하기 위해 스스로를 그렇게도 채찍질했는데 끝내 완벽하지 못해 이중으로 괴롭거나. 아, 세고 보니 셋이군요. 슬프게도 완벽하려 괴로웠는데 결과도 완벽하지 못한 이중의 괴로움을 겪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는 많은 것 같습니다.
굳이 완벽을 추구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삶은 고생과 괴로움 투성이입니다. 사람에게 상처받기도 하고 더 나은 삶을 꿈꿨는데 몇 일도 지나지 않아 포기하는 나 자신에게 실망하기도 하고 잘한다고, 열심히 한다고 했던 일들이 주변의 오해와 시행착오로 인해 안 하느니만 못한 결과를 낳기도 하지요. 그럴 때면 다 포기해버리고 싶은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행복은커녕 일상적인 작은 평화조차 사치인 것 같이 느껴져 사람도 사랑도 돈도 행복도 그저 다른 나라에서나 존재하는 단어처럼 느껴져 분노와 냉소 속에 스마트 폰 속 각종 플랫폼에서만 숨어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지요. 취업을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은둔해 사는 청년들이 많은 현재 대한민국의 사회적 분위기는 이런 맥락들을 고려하면 자연스럽기만 합니다. 이 상황에서 저축은 고사하고 행복을 위한 아주 작은 시도조차 배부른 소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포기하면 안 됩니다. 우리나라 사회에서 냉소의 대상이 되어버린 '노오력'을 그래도 해야 합니다. 혼신을 다해 노력을 해본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노력은 자신이 들인 노력의 크기와 관계없이 수시로 배신한다는 것을. 운이 좋으면 노력이 성공의 지렛대가 되지만 운이 나쁘면 노력 때문에 오히려 그 실패가 더 절망적이라는 것을, 노력을 해본 사람들은 깊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노력을 포기하지 않고 이어간 사람들은 이런 노력의 허무함을 딛고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종류, 어떤 방식으로든 노력 밖에는 답이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런데 정말 슬픈 것은 노력이 자기 맘대로 되지 않을 때가 더 많다는 것입니다. 노력은 강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노력은 화산과 같아 외부에서 어떤 불을 쏘더라도 터지지 않습니다. 오로지 어떤 계기로든 사람의 내면에서 동기가 유발되는 힘만이 당사자의 마음을 뜨겁게 만들어 노력이라는 용암을 분출시키지요. 관건은 가슴 안에 어떻게 그 분출의 힘을 만드는가입니다.
결정적인 큰 힘은 아니지만 적어도 분출의 시작점을 만들 수 있는 접근이 있습니다.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약자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고 깊게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값싼 동정을 가지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신이 지금 어느 상황에 있는지 객관적으로 직시하는 것에서 시작하자는 이야기입니다.
쪽방촌 독거노인, 배를 곯는 아이들, 박스종이 덮은 노숙인 등 희망이라는 단어조차 찾기 힘든 사회 구석진 곳에서 가장 힘겹게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언제부터, 어떤 이유로,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들여다보면 자연스럽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나는, 혹은 내가 사랑하는 배우자와 내 아이들은 절대 이렇게 살도록 하지 말아야지.' 하는 인간으로서 당연히 나오는 개인주의적이고 생존 추구적인 생각입니다. 입장 바꿔 생각했을 때 내가 누군가에게 있어 '절대 저렇게 되면 안 될 존재.'로 생각된다는 것은 너무 슬픈 일입니다. 안 그래도 힘겹게 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죄스럽고 미안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으로 오늘을 더 열심히 살 수 있다면 그분들에게 '나는 당신처럼 되지 않겠소.'라고 대놓고 상처 주는 말을 하지 않는 이상 자연스럽게 나오는 인간적인 생각에 미안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생각으로 오늘을 더 잘 살아보는 노력을 할 수 있으면 확률적으로 나와 내 가족들이 덜 힘겨운 삶을 살 확률을 높이는 것이고, 그것은 나와 내 가족이라는 가장 중요한 이웃을 돕는 동시에 사회적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최소한 늘어나지 않도록 해 세금이 지금 힘겨운 사람들에게 더 집중적으로 잘 쓰이도록 할 테니까요.
그리고 또 한 편으로는 높은 확률로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래도 나는 저 사람들보다는 나은 삶이라 다행이네.' 이 역시 생존이 본능인 인간에게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생각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삶이 비참한 이유로 누군가의 위안이 된다는 것은 당사자에게는 슬픈 일이지만, 불행했던 누군가가 그런 생각으로 내일을 살아낼 힘을 얻는다면 그 사람은 확률적으로 사회의 도움이 필요할 정도로 힘겨울 사람이 될 확률은 그만큼 낮아집니다. 한정된 사회복지 자원 속에서 사회복지 지원이 필요한 사람이 줄어들 확률이 늘어나는 것은 1원 한 푼 기부하지 않아도 힘겨운 이웃을 돕는 일이 됩니다. 우리 사회 속의 구석진 곳에서 너무도 힘겨운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며 '나는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 나는 적어도 저런 삶은 아니어서 다행이다.'라는 자기 생존 본능에 맞닿은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는 미안하고 죄스러울 수 있지만 그 생각의 결과로 오늘과 내일의 삶에서 어떤 것이든 더 많은 노력을 할 수 있다면 결과적으로는 어려운 분들을 돕는 가장 확실한 삶을 사는 셈입니다.
다만 인간은 이타심과 동정심이라는 본능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 세상에서 가장 무시하는 본능이자 이기심 보다도 더 강한 본능이기도 하지요. 출간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전 세계적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든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서는 우리가 만물의 영장으로서 최상위 포식자가 될 수 있는 비결에 관하여 '집단적 상상력'이라는 개념을 제시합니다. 내가 아닌 타인에 대하여 마치 자기 자신의 일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집단적 상상력이 여러 인간으로 하여금 집단을 이루어 서로 힘을 합치도록 하였고, 그로 인해 인간이 신체적으로 꽤나 나약한 존재임에도 압도적인 최상위 포식자로 등극할 수 있었다고 말이죠. 그렇게 보면 인간이 다른 동물에 비해 가장 압도적으로 잘 발달된 본능은 이타심과 동정심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또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내 상황이 조금만 나아지면 힘든 사람들을 어떤 식으로든 돕는 것에 삶의 일부를 할애하고 싶다는 생각. 아니 어쩌면 가진 게 없이 구석에 박힌 삶인 줄만 알았던 나의 삶은 알고 보니 조금이라도 나눌 수 있는 여유가 있는 가진 자의 삶은 아니었는가 하는 의문까지도 들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돌아보지 못한 것은 오로지 나보다 더 가진 사람들의 삶을 쳐다보며 하루하루를 살았기 때문은 아닌가 하고. 그리고 그 삶이 결국에는 나를 불행으로 이끄는 근본적인 원인은 아니었는가 하고 말입니다. 절망의 감정이 더 이상 물러설 곳도 기댈 곳도 없다는 상실감에서 비롯한다면 희망은 아무리 상황이 좋지 않아 보일 지라도 잘 살펴보면 조금이라도 디딜 곳, 기댈 곳이 있다는 충족감에서 나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비록 충분하지 않을지언정, 적어도 나누어 먹을 콩 한쪽이라도 있다면 그 나눌 수 있는 용기와 의지가 이타적인 본능으로 생존해낸 우리 인간에게 큰 희망을 주고 희망을 현실로 만들 노력까지 용암처럼 뿜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아닌지요.
궁극적으로는 이런 생각까지 들 수도 있습니다. '저분이 조금만 더 힘냈으면 좋겠다. 오늘 삶이 절망일지라도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내일 다시 시작하셨으면 좋겠다. 그러다 실패하고 좌절할지라도 희망의 삶을 다시 이어나가 언젠가는 더 행복해지시길 바란다.'는 진심이 담긴 응원의 마음과 생각 말입니다. 타인을 진정으로 응원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도 진정으로 응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연대'라고 부릅니다. 가장 전통적이고 인간의 본능에 충실한 단어지만, 공교육 등에서 가장 배우지 못하는 단어이기도 하죠. 우리는 자신과 비슷하게 혹은 더 어려운 환경에 있는 사람들을 보며 자기 일처럼 안타까워하고 돕고자 하는 본능을 발휘해 스스로를 도울 수 있습니다. 단순히 그런 연대의 마음을 갖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응원하고 하루하루 성실한 노력을 기울일 수 있는 힘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이지요. '더한 것도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어. 그중에는 견디는 것에서 더 나아가 놀라운 것들을 이루는 사람들도 많지. 나라고 다르지 않아.' 하며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 깊이 돌아보는 것은 크게 아래 네 가지 경로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1) 자신은 그렇게 되지 않겠다는 의지
2) 그래도 자신은 그나마 나은 삶이라는 위안
3) 소외된 사람들을 돕고 싶다는 욕구
4) 타인을 응원하는 마음과 생각
저 중 한 두 가지만 마음속에서 일어날 수도 있고, 많은 경우 네 가지가 모두 머리와 가슴속에서 꿈틀댈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습니다. 약자에 대한 깊은 관심과 따뜻한 시선은 어떤 방향이건 나 자신과 세상 모두를 이롭게 합니다.
지금 세상이 연대라는 강력한 본능이자 인간의 생존 기제를 철저히 무시하기에 누군가는 이 모든 사실에 대해 냉소하거나 회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25년을 수도원의 수사로 살다가 노숙인과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 "민들레 국수집"을 열어 운영하는 서영남 선생님의 삶을 읽어보면 숨겨진 연대 본능이 다시 살아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서영남 선생님이 직접 쓴「민들레 국수집 홀씨 하나」에는 민들레 국수집을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노숙인, 가난한 독거노인, 보호받지 못하는 아이들. 이 책을 통해, 또 다양한 경로로 이 사람들의 삶을 보면 크게 두 가지의 특징이 보입니다. 첫 번째로는 굶주리는 사람들이 그렇게 된 것은 대부분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말할 것도 없고 굶주리는 이들의 공통점은 사랑받아야 할 시기에 사랑받지 못하고 보호받아야 할 시기에 보호받지 못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부모로부터 버림받거나 학대받고 보호를 받아야 할 시기에 전혀 보호와 양육을 받지 못하고 심지어는 부모나 형제 등 누군가를 보호해야 하는 무거운 삶의 짐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세월 속에서 빚을 지고 갚지 못하거나 다치고 병드는 등 조금이라도 삶이 삐끗하면 바로 비참한 삶의 구렁텅이로 빠지는 것이지요. 물론 지금 세상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그것을 극복해 훌륭한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이 많다고.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나서 가난한 것은 오로지 그 사람의 잘 못이라고. 일면 맞는 말처럼 보이지만 이는 매우 훌륭한 사람들을 깎아내리는 말이자 세상을 과도하게 단순하게 보고 하는 말입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벗어나 삶을 개척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두 가지입니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사랑해주는 사람을 어떻게든 만나 기회를 얻었다는 것이 첫 번째이고 또 하나는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지 간에 그 사람 자체가 평균보다 훨씬 더 훌륭한 인격을 갖추었다는 점이 두 번째입니다. 훌륭한 사람은 칭송받아 마땅하지만, 훌륭하지 않다고 하여 그 사람이 못났다 비하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삶은 복잡합니다. 열악한 삶 속에서 기적적으로 사랑받는 기회를 얻는 사람도 있지만 그 기회조차 받지 못하는 삶도 존재합니다. 삶의 열악함과 풍족함이라는 것은 단순히 수학적으로 음식이 있고 없음, 편하게 잘 자리가 있고 없음으로 정의할 수 없는 영역이며 그 사람의 사회적 관계, 물질적 조건, 신체적 건강, 선천적인 기질 등 복잡한 맥락들이 겹쳐있습니다. 한 사람의 삶을 그 사람이 얼마나 가지고 얼마나 모았느냐로 단언하는 것이 매우 무지한 일인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서영남 선생님의 책에서 알 수 있는 굶주리는 사람들의 두 번째 특징은 잘 바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했듯 한 사람이 가난하거나 굶주리는 것이 그 사람의 잘못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 중 정말 많은 사람이 잘못을 저질러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거나 감옥에 가기도 합니다. 이 책의 저자 서영남 선생님은 수도원에 있던 시절 교도소에 있는 재소자들을 교화하고 위로하는 교정사목이라는 일을 해 민들레 국수집을 운영하면서도 많은 전과자들과 교류를 합니다. 그들 중 노숙인이 되는 경우도 많았고 재기를 하고자 서영남 선생님을 직접 찾아오는 경우도 많았죠. 안타깝게도 그들은 잘 바뀌지 않습니다. 알코올 중독이 자꾸 재발하거나 다시 교도소를 가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전과자가 아니더라도 노숙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밥 한 끼를 나눠준 민들레 국수집 그리고 서영남 선생님께 도리어 폐를 끼치는 경우도 다반사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이 사랑받지 못하고 보호받지 못한 까닭이라 한 들 쉽게 용서받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민들레 국수집에서는 폐를 끼치거나 반복적으로 죄를 범하는 이들이 다시 찾아오면 기꺼이 환대하며 밥 한끼를 대접합니다. 아니 직접 찾아가 '밥은 꼭 챙겨드시라.'권하고 챙기기도 합니다. 그러면 기적적 이게도 생각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재기하여 건전하고 성실함 삶을 시작하는 것에서 모자라 자신이 번 돈 중 일부를 기꺼이 민들레 국수집이나 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내놓기도 합니다. 사람은 잘 바뀌지 않지만 말 그대로 잘 바뀌지 않을 뿐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노력하다 보면 분명히 바뀝니다. 민들레 국수집은 끊임없는 사랑으로 그들에게 변함없는 기회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고 이런 기회를 받는 누군가는 자기 내면에서 타오르는 생존 본능과 이타적 본능을 일깨워 그것이 언제가 되었든 늦었다 생각하지 않고 스스로를 구원해 내는 것입니다.
다만 사람이 잘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은 나쁜 쪽이 아니라 좋은 쪽으로도 작용한다는 것을 우리는 서영남 선생님의 이야기를 읽고 들으며 알 수 있습니다. 민들레 국수집은 가난한 동네에 위치해 있습니다. 민들레 국수집을 찾는 손님들이 아니더라도 그 동네에 주민들은 대부분 열악하고 가난한 환경 속에서 삽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도 많은 주민들은 민들레 국수집이 김치를 담그고 많은 양의 요리를 준비할 때마다 기꺼이 자신의 팔을 걷어붙여 일손을 거듭니다. 놀라운 것은 민들레 국수집을 찾는 굶주린 손님들도 많은 경우 자기 뒤에 올 사람들을 위해 음식을 아껴먹는다는 것입니다. 본인이 당장 너무 배가 고픔에도 뒤에 오는 사람이 굶주릴까 음식 담아가는 데에 조심한다는 것은 이타적 본능이 우리에게 얼마나 강한 지, 사람이 잘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른 방식으로 일깨워 줍니다. 다행스럽게도 아직까지 우리 세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쁜 사람이 잘 바뀌지 않아 계속 나쁜 경우보다 좋은 사람이 바뀌지 않아 계속 좋은 경우가 더 많습니다. 나쁜 사람들 속에서는 적더라도 계속 좋은 사람들로 갱생되는 사례들이 나오지만, 좋은 사람들이 아예 나쁜 사람으로 바뀌어 세상을 혼탁하게 만드는 경우는 더 드물기에 인간은 여전히 만물의 영장으로서 생존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아가 비록 어떤 이유로든 죄없이 불행해진 사람이 그 불행으로 말미암아 죄를 저질러 진짜 죄인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들을 통해 우리 안에도 그런 죄인의 면목이 있다는 것을 직시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풍요로운 환경에 있다고 해도 우리는 많은 경우 감사함을 모르고 쉽게 세상과 남을 미워합니다. 풍요롭고 충분한 보호가 있는 상황에서도 쉽게 미워하고 남 탓만 하며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는 사람은 조금만 열악한 상황으로 빠지더라도 쉽게 죄를 범할 것입니다. 바로 우리 대부분의 이야기입니다. 극히 소수의 훌륭한 사람들만 세상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고생과 고난에 대해 남 탓을 하지 않고 미워하지도 않으며 묵묵히 성실한 삶을 이어갑니다. 때문에 우리는 응원해야 합니다. 굶주린 사람이 밥 잘 먹고 힘낼 수 있도록, 죄를 범한 사람이 사랑받아 그 죄를 스스로 씻어낼 수 있도록, 희망이 없다 절망하는 사람이 희망을 가지고 오늘을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