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세상 앞에서 무엇을 잃더라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오늘은 사도행전 14장을 공부 했다, 그 시대의 로마 제국 종교관에 대해 배웠다.
사도 바울과 초대 교회 성도들이 처했던 현실을 더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로마는 다신교 사회였고,
신이 많을수록 축복과 보호를 더 많이 받는다고 믿었다.
로마는 그리스(헬라) 종교를 그대로 흡수했고,
사람처럼 형상과 감정을 가진 올림포스 신들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철학자 키케로는 “몸 없는 신은 상상할 수 없다”고까지 말했을 정도로
당시 사람들에게 신은 인간과 똑같은 존재였다.
그 결과, 황제들은 스스로를 신처럼 여기기 시작했고,
특히 알렉산더 대왕은 자신을 신의 아들이라 칭하며 스스로를 신격화했다.
후대 로마 황제들도 그 흐름을 이어받아 자신을 신처럼 섬기게 했다.
이와 정반대로 기독교는
하나님만이 유일한 통치자시며, 제사장이 신을 대리해서 통치하는 정치였다.
왕이나 황제가 신이 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이런 종교관은 로마의 황제숭배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많은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받았고,
신앙을 지키는 것은 곧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이런 시대적 배경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한 뒤,
사도행전을 읽으면 감동이 더 크게 다가올 것 같다.
그 시대를 살아낸 진짜 믿음의 사람들이 선명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리고 곧 영어 원문으로 사도행전을 읽을 예정인데,
한글 성경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겸손하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깨달음을 기다리자.
“예수님은 주님이십니다” 그 한마디는,
감옥에 갇히고, 고문당하고, 처형당할 수는 있는 목숨 건 선언이었다.
그 사실 앞에 나는 다시 묻는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나에게,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을 지킨다는 건 여전히 세상의 흐름과 어긋나는 길을 걷는 일이다.
예수를 주라 고백하는 순간,
자연스럽게 세상에 주인 삼은 것들과 충돌하게 된다.
거짓이 만연한 현실, 부당한 관행, 욕망을 미화하는 문화 앞에서,
"저는 그리스도인이라서, 그건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사람들은 ‘답답한 사람’ ,‘혼자 튀는 사람’, 심지어 ‘왕따’로 취급하기도 한다
누군가는 회식 자리에서 술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하고,
누군가는 부정한 거래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직장을 잃는다.
“하나님 앞에 죄라서 할 수 없습니다”라는 이유로 고지서를 받듯 조롱과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스데반이 군중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순교한 장면이 생각난다.
불이익과 충돌 속에서
진짜 주인이 누구이신지를 삶으로 증명해 내는 것.
이건 어쩌면 지금 이 시대의 또 다른 ‘돌 맞음’ 은 아닐까?
세상이 주라 부르는 것들 앞에서,
나는 오늘도 예수님만을 주님이라 고백할 수 있는가?
내 안의 탐욕보다,
타협을 요구하는 분위기보다,
나를 안전하게 지켜줄 세상의 인정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몸 없는 신은 없다고 했던 시대에
하나님은 진짜로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인간이 만든 온갖 신들의 체계를 뒤흔드셨다.
그렇다면, 오늘 나의 고백도 그분처럼 진짜여야 하지 않을까?
이 질문 앞에서 나는 다시 생각해 본다.
그 시대의 바울과 초대 교회 성도들처럼
나의 믿음을 삶으로 증명하며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