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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상생각

가까워서 더 아픈 관계..

by 서은

얼마 전, 엄마와 크게 다툼이 있었다.

이 사건은 가족의 무게를 다시 돌아보게 만들었다.


나는 병원에서 환자 돌보는 일을 한다.

환자에게 친절하게 말하고,

더 좋은 말투를 쓰고, 더 조심스럽게 행동한다.


어느 날, 문득

거울 속에 비친 나의 ‘직업적 자아’를 보며 묘한 괴리감이 밀려왔다.


‘나는 환자들에게 친절한데,

정작 나를 낳아준 엄마에게는 어떤 딸일까?’


밖에서의 친절이 가식처럼 느껴지지 않으려면,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먼저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성경의 가르침도 내 마음을 움직였다.

그렇게 나는 엄마에게 ‘좋은 딸’이 되기로 결심했다.




엄마는 부정적이고 불평이 많은 분이다.

최근 이사 준비를 하면서인지, 목소리에 묻어나는 짜증이 더 심해졌다.

가슴이 답답했지만 '사람이 어떻게 쉽게 바뀌겠어'라며 이해하려 했다.

그래도 엄마는 변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최소한 보여주었으니까.


매달 생활비를 챙겨 드리고,

살갑게 전화를 걸고,

엄마의 입장에서 생각하려 무던히도 애를 썼다.

하지만 나의 노력은 번번이 엄마의 날 선 감정 앞에 길을 잃었다.


엄마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동생 부부가 이혼하며 남기고 간, 여섯 살배기 조카를 홀로 키우는 삶.


정작 부모인 동생 내외는 각자의 삶을 찾아 떠났고,

양육비 한 푼도 받지 못한 채,

황혼 육아를 감당해야 하는 엄마의 억울함과 고단함을 나는 안다.


그래서 이해한다.

그래서 더 잘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힘겨움이 고스란히 아이에게,

그리고 나에게 독이 되어 돌아오는 것을 지켜보는 건 또 다른 고통이었다.


말 한마디가 인격을 만들 시기인데,

엄마의 날 선 말투가 그대로 어린 조카에게 흡수 되는 걸 볼 때면 속이 답답했다.

“미운 여섯 살, 죽이고 싶은 일곱 살”이라는 말이 있다지만,

아이에게 가해지는 부정적인 영향이 걱정되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엄마, 말투를 조금만 부드럽게 하면 좋을 것 같아.”

나의 말은 엄마의 뇌관을 건드리고 말았다.

그 말 한마디에, 엄마는 갑자기 격한 감정을 쏟아냈다.


나는 더 말하면 싸움이 커질 것 같아서,

수화기 너머로 쏟아지는 엄마의 분노를 뒤로하고 전화를 끊었다.


잠시 후, 엄마에게 문자가 왔다.

“돈 꼴랑 몇 푼 주면서 개지랄한다. 다시는 돈 보내지 마라”


매달 드렸던 20만 원,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모멸감이 밀려왔다.

그 안에 담긴 나의 마음과 노력이 짓밟히는 순간이었다.




하루 이틀도 아닌, 평생을 반복해 온 엄마의 고질적인 패턴이다.

엄마는 기분이 곧 태도가 되는 사람이다.

불쾌한 감정이 올라오면 이성의 필터는 즉시 꺼져버린다.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의 경계는 무너지고,

날 것 그대로의 막말이 본능처럼 튀어나온다.


기분이 내키는 대로,

입에서 나오는 대로 쏟아내는 그 무절제함을 나는 평생 지켜봤다.

그래서일까. 이제는 분노보다 그저 안타깝고 처연하게만 느껴진다


솔직히 인정하자면, 더 이상 엄마를 보고 싶지 않다.

결코 바뀌지 않을 그 뻔한 굴레를 다시 마주할 힘이,

나에게 남아있지 않다.


예전의 나였으면,

“내가 더 잘해야 했는데…”

죄인처럼 괴로워했을 거다.


하지만 이번엔 이상하게도 마음이 차분했다.

마치 어떤 결론에 스스로 도착한 사람처럼.


우연히 보게 된 유튜브 영상 속 어느 교수님의 말이 떠올랐다.

“가족도 핏줄이라 콜레스테롤이 쌓입니다”

“좋은 가족이 있고, 나쁜 가족이 있습니다”

“나에게 해로운 가족이라면 거리를 두는 게 맞습니다.”


내가 살아오면서 경험한 가족이라는 관계는,

솔직히 말해 ‘좋은 영향’을 줬던 적이 거의 없다.

남동생과는 이미 오래전부터 연락을 끊었다.

엄마와의 관계는 늘 무겁고, 상처와 죄책감이 반복됐다.




결국 결론을 내렸다.

내 영혼을 파괴시키고 나에게 안 좋은 영향을 주는 관계라면,

가족이라도 거리를 두는 게 맞다.


똥물이 튀는 곳에 서 있으면서 내 옷이 더러워지지 않기를 바랄 수는 없다.

내 마음이 건강하고 긍정으로 채워져야

내 남편에게도, 내 주변 사람들에게도 좋은 에너지를 줄 수 있다.


엄마의 독성 짙은 감정에 전염되어 부정적인 것들로 채워지면,

내 주변 또한 나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연락하지 말자.

하나님께 엄마를 위한 기도만 남겨두고, 잠시 문을 닫자.

죄책감 말고, 나를 지키는 마음으로.



아이러니하게도 가족보다 타인을 대할 때 더 조심하게 된다.

가족이라는 이름 하나로,

너무 막대하고, 존중하지 않고, 자기감정도 컨트롤하지 못하는 모습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서로를 할퀴는 관계라면,

차라리 연락하지 않는 게 낫다.


거리를 두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고 했다.

정말로 그럴까?

아직은 모르겠다.

다만 지금은, 나를 지키는 게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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