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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ne May 19. 2023

미운 우리 영화관

자기가 판 무덤에서 울기

영화관의 쇠퇴와 죽음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이에 관한 짧은 생각을 써보려 한다.

먼저 난 영화를 좋아하는 ‘어느 정도의 씨네필’이지만, 영화관을 사랑하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나에게 영화는 어릴 때 TV명화극장에서 주말 아침과 저녁에 볼 수 있는 것이자 부모님이 보러 가고 싶어야 볼 수 있는 것이었고 DVD방에 있는 영화들도 상당히 제한되어 있었다. 그 후 성인이 되고 케이블 TV와 유료 다운로드 영화를 거쳐 넷플릭스와 왓챠 등 OTT를 만났다.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서 영화관에서 더 많은 영화를 보게 되었고 그제서야 영화관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만큼 영화‘관’을 사랑하는 사람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 중 아주 일부라는 뜻이다.


오랫동안 우리나라 사람들은 나들이의 일종으로 영화관을 갔다. 영화관 가서 영화 한 편 보면서 팝콘 먹고, 밥 먹고, 커피 마시고. 가족과 연인, 친구들의 데이트 코스 중 하나였지, 영화 그 자체에 굉장히 열망이 있어 가는 곳이 아니었다. 영화는 그에 맞게 어느 정도의 재미를 제공해 주면 됐었다. 하지만 코로나 때 나들이 자체가 어려워지면서 당연히 영화관은 가기 어려운 곳이 되었다.


문제는 그 이후이다.


코로나가 잠잠해지고 영화관에서 팝콘을 먹을 수 있는 정도의 시기가 되면서 관객들이 느는 조짐이 보였다. 그때 영화관들은 코로나 때 줄였던 영화관 노동자수를 다시 늘렸어야 했다. 하지만 멀티플렉스 관들은 대충 이를 뭉개고 넘어가면서 영화관 노동자들의 노동은 가중되고 제공되는 서비스는 보잘것없어졌다. 물가상승 때문에 ‘공간’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치재가 되고 있는 와중에, 영화관이라는 공간은 가격에 비해 사치스러운 서비스를 주지 않았다. 자율입장으로 티켓도 확인하지 않았고, 영화티켓은 영수증화 되고 청결도는 더 떨어졌다. 아무도 모르게 영화관에 들어가 휑한 영화관을 나오면서 더 이상 영화관에 가는 일이 설레지 않게 됐다.


이렇게 영화‘관’에 대한 기대감이 떨어지면서 영화 자체에 기대감은 더 커졌다. 이런 서비스를 당하면서도 이런 돈을 낸 영화가 나에게 주는 만족감이 떨어지면 더 실망하고 허망해졌다. 그래서 영화 자체에 대한 만족감을 위해 특별관에 대한 선호가 커졌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볼 것이라면, 돈을 조금 더 지불하고 좋은 관에서 좋은 영화경험을 하겠다는 열망에 아이맥스와 4D관은 자리를 구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이에 더해 영화들이 (특히 한국영화) 투자금 반환을 위해 코로나가 잠잠해질 시기를 기다리며 더더욱 개봉시기를 늦추고 있다. 하지만 개봉시기를 늦출수록 굉장히 완성도 있는 영화가 아닌 대부분의 영화는 개봉시기의 트렌드와 더 멀어졌고 사회와 호흡하는 영화가 아니라 좀 묵은 내 나는 영화들이 관객들에게 선보여졌다. 원체 관객이 원하는 영화보다 투자자를 매혹하기 위한 영화들이 많았던 한국영화계에서, OTT 콘텐츠들은 저만치 앞서 현재를 넘어 근미래적 세련됨을 담고 있는 와중에 이런 개봉 영화들의 묵은 내는 더욱 심하게 느껴졌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영화관들이 어떻게 해야 영화관에 올 것이냐며 우는 소리를 한다. 대중은 어이없기만 할 뿐이다. 고민도 없이 영화를 만들고 노력도 없이 영화관을 운영하면서 왜 돈을 안주냐고 징징대는 꼴이다. 이런 태도일수록 대중은 영화관이 더 미워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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