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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성빈 Feb 10. 2022

이야기는 '변화'다.

이야기를 쓰고 싶은, 어떻게 시작해야할 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대학교에서 문예창작과 수업을 들으면서 느꼈던 바는, 생각보다 많은 학생들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이야기를 이야기로서 기능하게 하는 데 성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다수의 학생들은 이 단계에서 실패를 겪었다. 이러한 실패는 창의성의 부재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학생들은 나의 예상과는 달리 놀라우리만치 개성 있는, 소위 ‘자기만의 것’을 저마다 아이디어 노트 한 구석에 지니고 있었다.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실패는 차라리 기술의 부재에 가까웠다. 예컨대 소설 합평시간에 가장 흔히 오갔던 지적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잘 모르겠다.”였다. 이미지의 활용, 기발한 비유, 기억에 남는 장면, 독특한 소재, 정서를 만들어내는 문체 등 세부적인 재료들에 대해선 칭찬하는 말들이 더 많이 오가곤 했다. 그렇다면 왜 학생들은 이야기를 구축해내는 데 어려움을 겪었을까. 이야기가 성립되기 위해선 어떤 전제조건이 필요할까. 여기에 대해 나는 우선 이야기가 어떤 종류의 글인지 먼저 정의해보려 한다.     



이야기는 주장하는 글     


  모든 이야기에는 주장이 담겨있다. 이 주장을 우리는 흔히 ‘주제’라고 일컫는다. 이야기는 글로 비유하면 논설문에 해당된다. 모 시나리오 작가는 시나리오에 대해 ‘설득의 도구’라 정의내린 바 있다. 옳은 말이다. 논설문에서 서론에 논점을 제시하고, 본론에서 근거를 들며 논증의 과정을 거친 후, 결론에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듯, 이야기 또한 마찬가지의 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다만, 논설문이 관념을 관념으로써 전달하는데 반해 이야기는 관념을 실재적인 사건을 통해 은유의 방법으로 제시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일종의 공정과정을 한 겹 더 걸친 논설문인 것이다. 정리해서, 결국 이야기는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일련의 과정을 거쳐 ‘논리적’으로 입증해내려는 글이다. 어느 작가에게나, 작가가 아니더라도 글을 쓰고자 하는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주장이 있고 자기만의 생각이 있다. 또한 순간순간 번뜩이는 자신만의 장면이나 인물, 혹은 이미지들이 있다. 하지만 그것들을 논리적으로, 하나의 중심 주장에 수렴하도록 입증해내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그렇다면 글을 쓰려는 우리는 그러한 요소들을 어떻게 이야기적으로 엮어낼 수 있을까. 수용자에게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는 이야기만의 논증방식은 무엇일까. 그것이 바로 ‘변화’이다.     



이야기=변화     


  ‘이야기’는 곧 ‘변화’이다. 가장 핵심적인 변화 하나가 이야기의 뼈대를 구성하며, 이야기 속에 담겨있는 모든 요소들은 결국 그러한 변화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존재한다. 로버트 맥기는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저서에서 변화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사건이란 변화를 의미한다. (…) 이야기적 사건은 등장인물의 삶의 상황에 의미 있는 변화를 일으킨다. 이 변화는 가치의 변화라는 형태로 표현되고 경험되며 갈등이라는 과정을 통해 얻어진다.”   

  

  이 문장에는 두 가지 맥락의 변화가 명시되어 있다. 첫 번째는 ‘가치의 변화’이다. 가치의 변화는 관념으로서, 이야기 내에서 직접적인 언어로 명시되지 않으며, 단지 이것은 기저에 내재된 채 이야기가 움직일 수 있게 만드는 동력으로서 작용한다. 다른 하나는 ‘삶의 상황에서의 변화’이다. 내가 이 글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두 번째 항목이다. 이야기에서의 변화는 실질적인, 눈에 보이는 영역에서의 삶의 변화를 의미한다. 주인공은 이야기의 처음과 끝에서 각기 다른 상황에 서 있다. 그 다른 상황을 대조하여 보여주는 것이 곧 이야기가 말하는 방식이다.

   또한 ‘삶의 상황에서의 변화’라는 용어에서도 유추해낼 수 있듯이, 이야기의 변화는 반드시 인물에 걸려있어야 한다. 변화하는 것은 언제나 주인공이거나, 혹은 주인공을 둘러싼 상황이다. 여기서의 주인공은 욕망을 가진 주체를 의미한다. 이야기적 변화는 인물이 자신의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 무언가 행동하는 과정에서 탄생한다. 인물은 자신의 욕망하는 바를 성취해낼 수도, 성취해내지 못할 수도 있으며 혹은 성취 과정에서 욕망 자체가 변해버릴 수도 있다. 이러한 성취 여부가 곧 변화를 만든다.          



아무리 작은 이야기라도 변화가 있다     


  이러한 변화의 원칙은 이야기의 규모와 관계없이 적용된다. 다음은 2021년 10월에 발표된 코카 콜라의 광고이다. 이 광고는 30초 분량의 짧은 이야기이지만 앞서 언급했던 이야기의 원칙들을 모두 지키고 있는 단편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QtzCnK45Wfg

코카 콜라의 이 30초짜리 광고는 '변화', '주제', '인물의 욕망과 결핍'이라는 원칙이 모두 갖춰짐으로써 이야기로서 성립된다.

  이 광고의 스토리를 요약해보면 ‘유령은 콜라를 마시고 싶지만, 이미 죽은 상태이기에 현실세계의 콜라를 잡을 수 없다. 어떤 소년이 이를 보고 콜라를 바닥에 떨어뜨리자(콜라를 죽게 만들자) 유령세계의 콜라가 되어 마실 수 있게 된다.’이다. 단순한 내용이지만, 이야기의 모든 원칙들이 충실히 엮여져 있다. 주인공(유령)에게는 ‘콜라를 마시고 싶다.’라는 욕망이 있으며, 이와 상충되어 욕망이 실현될 수 없게 만드는 결핍 또한 있다. 무엇보다도 변화가 명확히 드러난다. ‘콜라를 마실 수 없을 줄 알았는데 마실 수 있게 되었다.’가 이 이야기의 변화이다. 즉, 이 단편은 일련의 과정을 통해 주인공이 욕망하는 것을 쟁취해내는 이야기인 것이다. 또한 우리는 그러한 변화의 과정을 보면서, 변화 너머에 내재되어 있는 주제의식 또한 발견해낼 수 있다. 유령은 혼자의 힘으론 콜라를 마실 수 없었으나 누군가의 도움을 받음으로써 마실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이 광고의 주제는 ‘우리가 서로 힘을 합칠 때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다.’이다. 이는 해당 광고의 제목이 <함께라는 마법>인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제목을 이렇게 지은 것 또한 이야기 작법의 원칙 중 하나이다. 제목은 언제나 주제를 표상한다. 여기에 대해선 제목 짓기에 관한 포스팅에서 따로 언급하겠다.) 이렇듯, 모든 이야기들은 규모와 관계없이 변화 한 줄로 요약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이야기를 구상하는 단계에서 가장 먼저 확보해야 할 중심축 또한 이 변화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변화를 어떤 워딩으로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현해볼 수 있을까.          



변화를 만드는 마법의 문장     


  로버트 맥기의 잠언은 무척 유효한 것임에 틀림없지만, 습작 단계에서 그대로 적용하기엔 다소 추상적이다. 따라서 마지막으로 나는 본인이 이야기를 짤 때마다 유용하게 사용하는 문장을 하나 소개하려 한다.    

 

“~인줄 알았는데 ~였다.”     


  이야기적 변화의 핵심은 그것이 ‘가치의 변화’로 귀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작가 자신이 생각하기에 옳지 않은 가치를 도입에 제시하고, 결말로 나아가는 과정, 즉 가치가 변해가는 과정을 스토리 진행에 따라 점진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수용자를 설득해나가는 것이 이야기의 논증방식이다. 따라서 가치의 변화는 수용자의 입장에선 곧 ‘깨달음’의 방식으로 전달된다. 내가 이야기를 구상하는 단계에서 위와 같은 문장을 통해 변화를 정리해보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이제 실제로 적용해 보자. 앞서 언급했듯, 주제는 관념적인 문장이지만, 우리가 고려해야할 변화는 그 관념을 담아내는 실재적인 사건이다. 때문에 해당 문장의 빈칸에 들어가야 하는 것은 반드시 눈에 보이는 무언가여야 한다. 또한 변화의 주체는 등장인물이어야 한다. 앞선 코카콜라 광고를 예로 들어보자. 해당 광고의 변화는 ‘콜라를 마시지 못할 줄 알았는데 마실 수 있게 되었다.’이다. 여기서는 ‘콜라를 마시지 못한다, 콜라를 마신다.’라는 등장인물의 구체적인 행동이 빈칸을 차지한다. 빈칸에 들어갈 내용은 꼭 행동일 필요는 없으며, 무언가 몰랐는데 알게 된다는 인식의 변화가 자리할 수도 있다. 다만 여기서 인식의 대상이 되는 것은 마찬가지로 관념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이미지로 치환될 수 있는 현실의 무언가여야 한다.

  한 가지 더. 열린 결말은 어떨까. 모든 이야기가 반드시 명확한 결론을 내보이는 것은 아니다. 특정 사건에 대해 창작자 자신의 가설을 제시한 후 수용자에게 결론짓기를 유보하는 부류의 이야기도 있다. 이러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면 위의 문장의 마지막 부분을 살짝 변형하면 된다. “~인줄 알았는데 ~일지도 모른다.” 열린 결말은 끝을 흐리는 방식이 아니다. 단정 짓는 주장 대신, 창작자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강력한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그 외 모든 요소들은 같다. 예컨대 김애란의 소설 <가리는 손>의 변화는 “아들이 살인사건의 목격자인줄 알았는데 방관자였을 지도 모른다.”이다. (이것은 '인식의 변화'의 예시이기도 하다.) 소설 <가리는 손>은 동남아시아 혼혈 아들을 둔 엄마가 아들에 관련된 전말을 쫓게 되는 이야기이다. 그 과정에서 화자는 언제나 순수하고 평범한 아이었을 거라 믿었던 아들이, 실은 얼마나 많은 일상적인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는지, 그로 인해 얼마나 폭력에 무뎌졌는지 알게 된다. 이러한 ‘모름’의 상태로부터 ‘앎’의 상태로의 전환은 곧 동남아시아 혼혈인을 바라보는 우리의 보편적인 시선을 대변한다. 따라서 해당 소설에서의 ‘~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은, 역설적으로 소설의 주제를 강화하는 효과를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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