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이 되게 인상적이셨나 봐요. 친구가 말했다. 맞아, 인상적이었지. 그런데 왜? 나는 물었고 들려온 대답에 박장대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얘기 벌써 세 번째 하시거든요.
같은 말을 네 번 하지 않기 위해 여기 적어본다. 그날, 나는 스무 살의 가을을 지나고 있었고 그들은 대학 직원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 나는 모르지만 그들은 어떤 서류를 총장님께 전달하기 위해 행정관에 들어가고 싶어했고, 직급이 제법 높아 보이는 아저씨가 그들을 막아서고 있었다. 아니 이러지 말고 대화를 하자니까. 아저씨가 공청회를 제안하자 그들 중 하나가 외쳤다. “본계약 미루고 공청회 합시다!” 공청회를 열어서 시간을 벌어놓고 후다닥 본계약을 채결해버리려는 속셈을 이미 눈치챈 듯한 어조였다. 그래서 공청회를 하는 쪽으로 이야기가 되던 중 같은 사람이 다시 말했다. “최고 결정권자가 나오시는 거지요?” 결정권이 없다며 아무 약속도 하지 않아놓고 언론에는 공청회도 열어주었다고 생색을 내려는 두 번째 속셈을, 이번에도 눈치챈 듯했다. 와, 저렇게 똑똑한 사람이 있다고?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던 그날 이후 여러 우연을 거쳐 나는 그 사람들과 친해졌고, 얼마 뒤 그들이 사회주의자라는 걸 알게 되었다. 네? 사회주의요?
이 글이 사회주의를 권장하는 글로 읽히지 않기를 바란다. 그런 의도로 쓰는 글이 절대 아니고, 만약 내가 권장한다 해도 세상에 누가 좀 권장받았다고 해서 사회주의자가 되겠는가. 게다가 내 친구 중 일부가 사회주의자인 건 맞지만 내 친구의 절대 다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다. (근데 그럼 자본주의자인가? 말이 생소하긴 하지만 아마도?) 그럼 무엇을 권장하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냐면, 그들의 실천을.
스무 살의 나는 그들의 얼굴과 이름을 알게 되자마자 그들에게 빠져들었다. 존경했고 동경했고 사랑했다. 신이 나를 분수에도 맞지 않는 서울대에 보낸 이유는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려주기 위해서가 아닐까 생각할 정도로, 웬만해선 마음을 열지 않던 내가 그 사람들에게는 온 마음을 쏟아부었다. 빛이 난다고 생각했다. 팅커벨의 금빛 가루를 뿌리면 평범한 인간도 날 수 있듯이, 그들의 옆에 있다 보면 평범한 나에게도 그 빛이 조금 묻지 않을까 상상도 했다. 그래서 옆에 있고 싶었다. 자꾸만 말을 걸고 싶었고 생각을 듣고 싶었다. 그들의 어떤 점이 그렇게 좋았냐면, 실천을 동반한 말이.
아주 어릴 때부터 나는 가치관이 뚜렷한 사람을 좋아했다. 좋음과 나쁨에 대해서, 옳음과 그름에 대해서 자기만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내용이 무엇이든 졸졸 쫓아다녔다. 그런 생각을 말하는 사람들은 대개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에 대해서도 자신의 기준을 갖고 있었다. 우리 사회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열변을 토했고 그런 자신을 자랑스러워했다. 나도 그런 사람들을 멋있다고 생각했고, 어느 정도는 나도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한 번도 해본 적 없다는 것을, 스무 살 가을에 그 사람들을 보고서야 알게 된 것이다.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당신은 무엇을 했는데요?
그때껏 내가 봐 온 멋진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과 기준과 이상을 갖고 있었지만 그걸 실현하기 위한 노력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나 스스로를 포함해서 그 누구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는 건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간도 노력도 그 무엇도 자신의 이상을 위해 쓰지 않는 것, 그것이 얼마나 멋없는 일인지를 그제야 알았다. 말한 대로 살기 위해 시간과 노력과 자신을 모조리 쏟아붓는 사람들을 보고서야.
그러니까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 말 두 마디가 아니었다. 그 말을 실천하기 위해 그 자리에 서 있다는 점이었다. 사회주의자라고는 한 줌밖에 남지 않은 2013년의 서울대에서, 남들이 학점을 관리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동안 자기들은 재판을 받고 벌금을 내면서. 원하는 미래를 만들기 위해 자기 미래는 몽땅 포기한듯이 굴면서.(범법을 옹호하려는 것은 아니고, 그들이 많은 리스크를 무릅썼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이 문장을 넣었다. 전과자가 되고 싶은 서울대생이 어디 있겠는가.) 이십대에 사회주의자가 아닌 사람은 심장이 없는 사람이고 삼십대에 사회주의자인 사람은 뇌가 없는 사람이라는 얘기를 어른들은 자주 했다. 그러면 나는 그들의 삼십대를 상상해보곤 했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들 대부분은 뇌 없이도 잘 살아가는 중이다. 뇌를 위해 빛을 포기한 나와도 여전히 친구 관계를 유지해주면서. 고맙게도.
나는 지금도 자기만의 이상사회가 있는 사람을 쫓아다닌다. 직접 설정한 기준이 있다 싶으면 좌우든 상하든 내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들에게 이것저것 묻고 그들의 말을 주의깊게 듣는다. 그리고 조용히 살핀다. 그래서 이 사람은 무엇을 하고 있지? 자기의 무엇을 포기했지?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다시 말해 실천하지 않으면 내 관심은 곧 식는다. 나는 나보다 멋진 사람, 나보다 빛나는 사람을 찾아다니니까. 나같은 사람이 아니라.
그래서 그 친구들은 여전히 내 자랑이다. 사상이나 정치색을 떠나서, 자신의 말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이 생각하는 올바름을 위해서 안락함을 포기한, 안락하지 않은 그 삶이 행복하다며 웃는, 드물고 귀한 사람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