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루한 땅에 내려진 비밀스러운 햇볕
설연휴 동안 넷플릭스와 유튜브에 있는 대부분을 섭렵했다. 그래서 넷플릭스에 올라온 명작 중 아내와 나 둘 다 아직 보지 않은 것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살아온 세월이 있어서 그런지, 둘 다 안 본 작품들은 거의 없었다. 한참을 뒤적거린 결과 이창동 감독의 밀양을 찾을 수 있었다.
밀양-이라는 작품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어떤 감독이 만들었고, 누가 출연하며, 국제적으로 어떤 상을 수상하였는지 등을 말이다. 하지만 내용에 대해서는 몰랐다. 왜 그렇게 유명하며, 너도나도 인생 최고의 영화로 꼽고 있는지를 말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남편의 고향이라서 내려와 살겠다는 신애(전도연 역할)가 아들과 함께 밀양으로 향한다. 정착하는 과정에서 억척스럽게 현지에 적응해보고자 하나, 그녀를 아니꼽게 본 누군가가 아들을 유괴하여 살해한다.
남편에 이어 아들까지 잃게 된 신애는 기독교에 마음을 의탁하며 생기를 되찾는다. 독실한 기독교인이 된 신애는 교회 정신의 최고봉인 희생과 용서를 실천해보고자 하나, 살인범 역시 기독교인이 되어 셀프-용서를 받은 것을 알게 된다. 종교가 대체 누굴 구원하는것이지- 하는 회의감에 빠진 신애는, 역설적으로 하늘을 보며 반-기독교적인 행동을 수행한다.
여러 사건을 겪은 후 신애는 거울을 통해 살인범의 딸을, 자신의 모습을 직접 마주하며 영화는 끝난다.
영화를 보는 동안 신애의 아픔과 불안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리고 그녀가 처한 환경에서는 최선의 선택들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줄거리의 개연성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 영화'라 손꼽는 그 깊이를 직접 마주해보니 나만의 리뷰를 쏟아보고자 한다. 그래서 영화가 끝난 후, 신애의 고통과 종찬의 서성거림이 남긴 단상들을 정리해본다.
신애를 보며 심적으로 힘든 사람에게 어떻게 종교가 다가가게 되는지 다시 한번 보게 되었다. 정확히는 제삼자로써 상황을 볼 수 있어서 알게 된 것이겠다.
과거 천주교 교인이었던 사람으로서 어린 시절 성경책을 참 많이 읽었다. 어른들이 읽는 버전으로도 읽었고, 만화책으로 된 버전으로도 읽었다. 영성체와 견진 성사를 위해 성경을 필사하면서 구약/신약에 어떤 내용이 있는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슬람과 유대교, 가톨릭과 개신교가 어떤 뿌리를 가지고 있으며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공부한 바 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면서 더 힘들었다.
그들이 사용하는 단어와 문장은 일상적으로 외운 것을 읊는 수준에 불과할지라도, 마음이 힘든 사람에게는 얼마나 사람을 보듬고 희망을 주는 언어인지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들의 사용하는 언어는 고능하고 상위 level의 영역처럼 느껴지는데, 동시에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옭아매 고 있다고 보였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에서 이룬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나이다.
저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서
주님의 사랑으로 그 형제를 품게 하시고, 자매님의 마음속에 참된 평안과 용서의 마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사랑하게 하옵소서
베테랑 종교인일수록 말빨이 좋아진다.
기도합시다- 라고 말한 이후에 혼자서 내뱉는 독백들이 여느 모노로그를 찍는 베테랑 배우들의 대사력을 뺨친다. 온갖 좋은 단어와 포용적인 문구들, 관용적으로 사용되는 낮춤과 함께하자는 응원이 난무한다. 마음이 몹시도 힘들 때 특정 대상에게 모든 것을 이양하고 마음의 평안을 얻는 삶을 살게 된다. 종교가 진짜인지 아닌지에 상관없이, 심리적 모르핀(morphin)을 꽂아 넣는다. 사실 이것만이 종교의 A to Z가 아닐까.
이천년을 넘게 이어져온 명맥의 힘을 보여주듯이, 단지 100년을 살 수 있는 개인이 생각해내기 어려운 상황과 단어를 사용하며 찬송가사를 지어 부른다. 왜 내게 불행이 찾아오는지는 구약성서 속 욥의 사례를 통해 설명하고, 언젠가는 찬란한 미래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솔로몬의 호황기를 통해 말한다. 지금의 수난이 결국 금빛 파라다이스로 가는 Road라는 설명을 수없이 많은 성경 속 이벤트들을 통해 말을 한다.
그런데,
나의 평안을 얻는 것에는 괜찮은 방법이지만, 내게 큰 고통을 주었던 사람마저 마음의 평안을 얻어도 되는 것일까. 영화 속 살인범도 교도소 안에서 좋은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다.
"눈물로 회개하였고, 하느님을 믿으며 그에게 용서받았습니다"
14세기 르네상스를 촉발시킨 면죄부 사건이 마치 이렇게 발생했을 것이다. 옆사람을 찔러서 다치게 해 놓고, 뜬금없이 신에게 달려가 면죄부를 받듯이 말이다. 아주 극소수만 음성을 들었다고 하는 그의 앞에 가서 혼자서 질문하고, 회개하고, 용서를 구해서,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는 것이다.
모니터 밖 관객일 뿐인 나도 꼭지가 돌아버리는데, 당사자인 신애에게 누가 신앙심이 깊지 않다고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종교가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해 보는 동시에, 종교의 귀의하지 않도록 나와 내 주변을 신경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살이라는 것은 그 방법이 무척 다양하나 대표적으로 꼽히는 방법은 많지 않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것, 수면제 등 약을 대량 복용하는 것, 그리고 손목을 그어 과다출혈로 사망하는 것.
이 정도뿐인 이유는 아마도 셀프-킬링, 수어사이드의 상황에서는, 이에 수반되는 고통을 최소화하거나 모른 체-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영화에서는 몇 가지 방법이 사골국물처럼 재탕하며 쓰이곤 한다.
그런데 어린 시절 나는 초등학생 5학년 학생 몇이 둘러앉아, 방법론에 대해 깊은 토론을 한 적이 있다.
수술용 메스처럼 날카로운 칼이 아닌 이상 손목을 가로로 그어서는 죽을 수 없다. 손목에 위치한 힘줄과 인대, 근육들이 결이 맞지 않게 들어온 칼을 받아주지 않아, 깊은 상처를 낼 수 없다.
커터 칼을 사용해 대충 긋기만 하면 얕은 상처를 입을 뿐이고, 깊게 힘을 주어 긋는다면 칼날이 부러질 것이다.
또한 깊은 핏줄을 타격하기 어렵기에, 출혈량이 낮은 관계로 삼투압 효과를 통해 빠르게 피를 빼야 한다. 그래서 목욕물을 받아놓고 손목을 그어야 하는 것이다.
다른 의견도 있었다. 진정 죽겠다고 마음을 먹는다면, 손목을 가로로 긋지 않고 세로로 그어야 한다는 것이다. 칼날도 잘 들어갈 것이며, 출혈량도 충분하여 의도한 대로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왜 어린이들이 모여 머리를 맞대로 죽음의 방법을 논의했는지는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손목을 가로로 그으면 죽겠다는 의지보다는, '나 죽을지도 몰라-'라고 주변에 알리는 것에 더 목적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기에 영화 속 신애가 하늘을 쳐다보며, 과도로 손목을 긋고 나서 밖에 나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살려달라고 도움을 요청하는 장면이 나에게는 다르게 받아들여졌다.
"하- 힘드니까 죽어야겠다-" 가 아니라 "나 죽을만큼 힘든데 나 좀 봐주세요"- 라고 몸부림 치는 것임을 말이다. 이 외침은 결국 영화의 제목인 '비밀스러운 햇볕'을 갈구하는 신애의 본능적인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마음속 깊은 절망은 정상적인 소통을 불가능하게 하고, 조금은 왜곡된 방식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게 만들곤 한다. 그러니 내가 바라보게 되는 많은 반응과 대화들이 늘 정상적이지만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쩌면 영화 속 그녀처럼 이라도 소통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전도연? 그게 언제적 전도연이야 - 라고 하겠지만, 그녀가 쌓아올린 다양한 필모그래피와 수상실적은 우리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와 동시에 그녀가 쌓아올린 커리어가 성형외과 원장들이 꼽는 가장 이상적인 외모를 통해 이루어진 게 아니라는 것까지 말이다.
영화에서 나오는 신애의 모습에서는 전도연 배우 특유의 콧소리가 다르게 다가왔다. 낯선 상황을 부끄러워하면서도 억척스럽게 살아가려고 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와중에 새로운 공간에서 새롭게 세팅된 모습으로 잘 살아내겠다는 의지가 느껴지기도 했다. 그것이 너무 자연스럽고 몰입이 되어서, 그녀가 온몸으로 보여주려는 상황과 감정이 한 톨도 흘러넘치거나 손실을 보지 않고 나에게 온전히 넘어왔다. 그녀의 고통, 방황, 분노, 작은 희망이 아마도 그녀가 느낀 만큼 나도 느꼈다.
그러나 지난번 리뷰했던 서브스턴스의 데미 무어처럼 배우의 능력치라는 것은 어떻게 측정이 되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배역에 온전히 녹아들어서, 작가도 감독도 생각지 못했던 환상의 하모니를 보여줄 때 큰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기가 막힌 작품을 만나서 감독과 출연진들과 시너지를 내면서 너무나도 좋은 운을 타고나야 하는 걸까. 다양한 경우가 있겠으나, 이번에도 나는 각본을 쓴 작가와 감독의 역량이 위대한 배우를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것에 한 표를 던져본다.
물론 전도연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해낼 수 있을 작품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전도연 씨의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만큼이나 밀양의 각본을 쓰고 연출한 감독도 역시 정말 큰 찬사를 받아야 한다고 내 후기에서라도 한 줄 꼭 남기고 싶은 마음이다.
지금은 대 배우가 되어버린 송강호의 젊은 시절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송강호만 젊은 게 아니었다. 이성민도 그랬고 염혜란도 그랬다. 2026년인 지금에 와서 보니 대성한 배우들이 많이 출연했지만, 송강호는 당시에도 꽤 주연의 반열에 오른 상태인데도 영화 속 종찬의 역할을 했다는 것이 조금은 의아했다. 영화 말미에 가게 된다면 그의 존재감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겠으나, 조금은 사이드로 빠지는 배역인 것은 확실하니깐 말이다.
영화는 2007년에 개봉하였는데 그의 전체 필모그래피를 다시 한번 살펴보게 되었다.
97년 넘버3
99년 쉬리
00년 반칙왕, JSA
03년 살인의 추억
06년 괴물
07년 밀양
08년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09년 박쥐
13년 설국열차, 관상, 변호인
15년 사도
16년 밀정
17년 택시운전사
19년 기생충
그에게 밀양이라는 작품이 최고의 작품은 아니었을지언정, 밀양에서 사이드 역할로 나오기에는 정말 많은 히트작이 이미 있었다. 게다가 앞으로도 주연으로써 계획된 영화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주인공인 전도연 뒤에서 한 발자국 뒤에서 연기하고, 뒤 따라다니고, 그녀의 변덕을 무심하거나 넉살 좋게 넘기는 종찬이라는 역할을 맡았다. 그의 끊임없는 연기 도전과, 늘 주연으로써 스포트라이트만 독식하지 않는 인물 선택에서 큰 감명을 받았다.
우리는 작은 노력 후에 작은 보상이, 혹은 큰 보상이 따르길 바란다. 그 보상이 없다면 동기가 약해져 작은 노력을 크게 키우지 못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하지만 인생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큰 보상이 나올 때까지, 혹은 그 과정 자체를 보상으로 여기며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지 않던가. 일명 존버-만이 답이다
송강호라는 배우가 왜 이토록 '사이드'에 머무는 배역을 선택했을까에 대한 의문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해소된다. 그는 늘 신애의 뒤에서 서성였지만, 신애가 비로소 거울을 통해 자신을 직시하는 그 결정적인 순간, 그녀의 눈앞에서 거울을 들고 있는 유일한 남자의 포지션을 차지한다.
영화의 제목인 '밀양'을 풀면 한자로, 영어로 풀어보자. 비밀 밀에 볕 양. Secret Sunshine. 비밀스러운 햇볕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햇볕은 거창한 신의 은총이나 숭고한 기운이 아니다. 햇볕은 어디에나 있지만 필요할 때마다 늘 곁에 있는 것은 아니며, 그렇다고 대단한 선의나 목적을 가지고 비추는 것도 아니다. 그저 그곳에 존재할 뿐인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이다.
만약 햇볕에게 공인(公人)에게나 들이대는 엄격한 도덕적 검증의 잣대를 들이댄다면, 햇볕은 그 자격을 박탈당할지도 모른다. 영화 속 종찬도 그렇다. 다방 아가씨와 실없는 농담을 나누고, 부모님께는 퉁명스럽게 전화를 끊는 이 세속적이고 촌스러운 남자를 '성자'라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이 종찬을 '시크릿 선샤인' 그 자체로 만든다. 신애가 그토록 매달렸던 '하늘의 신'은 그녀의 고통을 건너뛰고 가해자를 먼저 용서해버리는 배신을 안겼지만, 종찬은 달랐다. 그는 따뜻한 반응이 되돌아오길 기대하지도, 그녀가 도덕적으로 완벽해지길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일방적으로, 꾸준히, 신애라는 그늘 옆을 서성일뿐이다.
신에게서 답을 찾지 못한 신애에게, 가장 세속적인 모습으로 곁을 지키는 종찬은 인간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땅 위의 구원'이었을 것이다. 주인공 곁에서 늘 한 발자국 뒤쳐져 걷는 배역임에도 송강호가 이 역할을 선택한 이유는 아마도 이것이 아닐까.
가장 낮은 곳에서 거울을 들어주는 사람, 그 비루하면서도 따뜻한 온기야말로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한 진짜 구원이었을 것이다.
영화를 보는데 해설이 있으면 좋을 때가 있고, 불필요할 때가 있다.
이번 영화를 보면서는 굳이 남의 해석을 필요로 하진 않았으나, 내가 리스펙 하는 이동진의 해설은 한 번 들어보고 싶었다. 유튜브를 검색해 보니 그가 인생 최고의 영화로 뽑은 바 있어 더 깊이 있는 성찰이 가능하겠다 싶었다. 많은 해설이 있었지만, 내가 차마 생각하지 못했고, 그가 너무나 맛있게 떠먹여 준 주제가 하나 있었다.
영화 속 신애는 1) 어디서 왔는지 나오지 않고, 2) 지금 현재 위치를 남을 통해서만 설명이 가능하며, 3) 남에게 보여지는 모습이 제일 중요하다가, 4) 거울을 통해 자신을 직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설명 한줄로,
왜 그녀가 밀양에 내려왔는지
왜 기독교에 마음을 크게 의탁하게 되었는지
왜 하늘을 쳐다보며 대결하고자 했는지
왜 이제야 거울을 통해 나를 쳐다보게 되었는지
왜 햇빛이 오는 곳이 아니라, 도달한 곳에 시선을 두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결국 비밀스러운 햇볕은 하늘이 아니라, 우리가 딛고 있는 이 더러운 땅 위 어디에나 비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내 감상에 그의 감상 한 스푼을 얹어 후기를 마무리 지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