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와 줄리언 반스 - 후기

빌려온 시선 : 소수의 의견은 어떻게 나의 세계를 지배하는가

by 비읍비읍

요즘은 가만히 있어도 무언가를 보고, 읽고, 듣게 된다. 의도적으로 고른 콘텐츠도 있지만, 알고리즘이 무심코 던져주는 것들이 내 하루의 절반 이상을 점유하기도 한다. 유튜브 영상 하나, 영화 한 편, 뉴스 기사 몇 개,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 나누는 파편화된 대화까지. 이렇게 접한 것들은 어느 순간 생각의 재료가 되고, 나를 설명하는 문장이 된다.


사람은 자기가 만난 사람들의 총합이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요즘의 나는, 내가 접해온 콘텐츠들의 총합에 더 가깝다. 굳이 따지자면 나는 나 자신이기 이전에, 내가 본 것들의 결과물인 셈이다.


그동안 브런치 스토리에 여러 콘텐츠의 후기를 남겨온 것도 실은 나를 구성하는 재료들을 정돈하는 과정이었다. 다만 이번에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하나의 콘텐츠에 대한 후기를 남기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콘텐츠가 나의 일부가 되어가는 과정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유독 자주 떠오른 것이 있었다. 콘텐츠 자체보다도, 그 옆에 붙어 있던 말들이었다. 누군가의 해석, 짧은 코멘트, 몇 줄의 의견들. 그것들은 때로는 이해를 돕는 역할을 했고, 때로는 생각의 방향을 미리 정해버리는 장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같은 ‘소수의 의견’인데도 이상했다. 어떤 의견은 나를 이해하게 만들었고, 어떤 의견은 나를 오해하게 만들었다.




콘텐츠와 의견, 그 모호한 경계에 대하여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이 글에서는 ‘콘텐츠’와 ‘의견’을 조금 인위적으로 나누어보려 한다. 물론 세상의 모든 것이 콘텐츠일 수 있겠지만, 이 글 안에서만큼은 이 구분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내가 말하는 콘텐츠란, 화자가 자신의 이름과 시간, 경력과 실패까지 함께 걸고 내놓은 결과물이다. 책, 영화, 레거시 미디어의 기사들이 여기에 속한다. 나는 이런 결과물 앞에서 종종 일종의 경외심을 느낀다. 나보다 한 단계 위의 사유를 만난 것 같다는 느낌 때문이다. 그것은 익명성에 숨어하는 말이 아니기에, 화자가 쌓아온 신뢰를 바탕으로 한 꽤 정제된 결과물이다.


반면 내가 의견이라 부르는 것들은 조금 다르다. 콘텐츠를 설명하거나 평가하는 짧은 말들, 익명성 뒤에 숨어 있는 댓글들, 대표성이 불분명한 소수의 인터뷰들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의견들이 때로는 콘텐츠 자체보다 더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사실이다.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이른바 ‘Wag the dog’ 같은 감각은 나의 사고 안에서도 종종 발생한다.




최근 나는 두 권의 책을 읽으며 내 ‘독자로서의 레벨’이 가진 한계를 처절하게 실감했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과 줄리언 반스의 《우연은 비켜가지 않는다》였다. 솔직히 말하면, 읽는 내내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게 진짜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1.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햇빛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고?"


카뮈는 이미 노벨문학상으로 그 권위가 증명된 거장이다. 하지만 그의 대표작 《이방인》은 상식의 세계에 사는 나에게 지독히도 불친절했다. 이 책을 짧게 설명해보자.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던 사내 뫼르소가 해변에서 단지 ‘태양이 뜨거워서’ 아랍인을 살해하였고, 재판과정에서는 논지에 벗어난 질문들에 성실하게 조사에 응하지 않다가 사형을 선고받는 내용이다.


당혹스러웠다. "내가 문해력이 떨어지나? 고전이라는데 이게 대체 무슨 내용인 것이지?" 하는 자괴감마저 들었다.


2. 줄리언 반스의 《우연은 비켜가지 않는다》: 노벨상으로 가는 길목에서


줄리언 반스의 이 소설을 집어 든 이유는 명확했다. 그는 이미 부커상을 거머쥔 작가였다. 최근 한강 작가가 부커상 수상 후 노벨문학상까지 거머쥐는 것을 보며, 부커상은 마치 '노벨상으로 가는 로드 투 로드(Road to Lord)'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대를 안고 펼친 책은 난해함 그 자체였다. 주인공 닐이 스승 엘리자베스 핀치를 추억하며 그녀의 사상을 집요하게 추적하지만, 책은 마지막까지 그녀가 정확히 어떤 사람이었는지 명쾌하게 정의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결론이 뭐야?"라며 책장을 덮으려는 찰나, 어렴풋한 깨달음이 찾아왔다.


그렇다.

이 "무슨 소리야?"라는 당혹감 자체가 바로 작가들이 설계한 지향점이었던 것이다. 이해 안 되는 것 자체가 주제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기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작가는 기존의 관습에서 벗어난 인간이 사회 속에서 어떻게 ‘이방인’이 되는지 보여주었다. 그리고 타인을 완전히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가 얼마나 오만한지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이다.


상식과 규범 안에서 살아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온 나 같은 일반-독자에게, 이 소설들이 쉽게 와닿을 리 없었다. 첫장을 펼치는 사람 중 누가 이해가 안된다는 게 목적이거나, 부조리가 목적인 글일 것이라고 예상을 할 수 있었을까.




긍정적 전이 — 이해의 사다리가 되어준 소수의 의견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혼자 다시 읽어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책의 해석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의 말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동안 난 그들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았다. 해석은 다양할 수 있고, 누군가의 말이 정답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번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이 책을 완전히 숙독한 것 같았고, 이해하려 최선을 다한 흔적이 곳곳에 있었다. 그들이 제시한 것이 정답은 아니었지만, 내가 다른 의견을 전혀 낼 수가 없었으니 최선의 해-라고 할 수 있겠다.


1. 카뮈가 보여준 '부조리'의 민낯


이동진의 파이아키아에서 진행한 해설, 일당백(유튜브 콘텐츠 이름)과 민음사TV에서 내놓는 콘텐츠를 집요하게 찾아보았다. 그들 같은 전문가 해석을 거치자 뫼르소는 사이코패스가 아닌 '조리 있는 세상의 바깥에 있는 사람'으로 살아났다. 그가 재판장에서 단죄받은 것은 살인 행위 그 자체가 아니라,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관습적 도덕의 미이행' 때문이었다. 쏟아지는 태양빛에 사고력이 마비된 인간의 원초적 상태를 이해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의 딱딱한 대화들이 입체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2. 줄리언 반스가 말하는 '이해 불가능성'의 존중


부커상 수상자의 저력은 해석의 사다리를 만났을 때 비로소 빛을 발했다. 전문가들은 이 책이 '타인을 온전히 이해해야만 사랑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아니오'라고 답하고 있음을 짚어주었다. 상대를 완벽하게 이해한다는 오만을 버리고, 그 '이해할 수 없음'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사랑과 존중의 시작이라는 것.


이 경우에 소수의 의견은 분명 도움이 되었다. 나는 그들의 말을 통해 책을 ‘이해한’ 것이 아니라, 이해에 도달할 수 있는 지점까지 밀려 올라간 것에 가까웠다. 내 수준이 철학사 속 연도를 외우는 학생에 머물러 있었다면, 그들은 철학을 공부하고 자신의 사고방식을 잠시 빌려주고 있었다. 이것이 내가 경험한 긍정적 전이였다.




부정적 전이 — 세상의 온도를 뺏어가는 익명의 소음


같은 구조의 소수의 의견이,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 경우도 있었다. 최근 보게 된 한 유튜브 콘텐츠는 대학생들 사이에서 후배가 선배에게 밥을 사달라고 하는, 이른바 ‘밥약’ 문화에 대한 이야기였다. 고물가 시대에 누가 누구에게 밥을 사달라고 할 수 있느냐는 문제 제기와 함께, 후배들은 철부지로, 선배들은 생활비에 허덕이는 존재로 묘사되었다.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 아래에 달린 댓글들이었다. 각자도생의 시대에 구걸하지 말라는 말들, 세상이 언제 이렇게 망가졌느냐는 한탄들. 공감 수는 제법 높았다. 그 순간, 나는 묘한 불편함을 느꼈다.


나 역시 대학생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대학 생활은 그렇게 삭막하지 않았다. 동경할 만한 선배들이 있었고, 밥 한 끼를 얻어먹으며 미래와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시간들이 있었다. 나 역시 선배가 되었을 때, 내 한 몸 건사하기 빠듯한 형편이었지만 후배들에게 밥을 사주기 위해 주말 알바를 뛰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돈으로 비트코인을 샀거나 S&P500에 적립식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적어도 그때의 나는, 그런 선택지 대신 사람을 택하며 살았다. 그것은 단순한 소비가 아니라, 설익은 선배로서 성장하기 위해 치른 비용이었다.


그런데 몇 개의 인터뷰와 댓글, 그리고 소수의 의견들이 모여 그 모든 맥락을 지워버렸다. 세상은 이미 황폐해졌고, 관계는 비용으로만 환산되며, 갈등은 필연적인 것처럼 정리되었다. 현실이 아니라, 갈등이 가장 잘 소비되는 장면만 남은 느낌이었다. 요즘 MZ세대를 마음속 깊이 혐오하게 되었고, 고물가 시대로 만들어버린 (나보다 더) 기성세대에게 불만이 터져 나왔다.


이것이 내가 경험한 부정적 전이였다.




빌려온 시선에서 나의 시선으로


왜 우리는 직접 경험한 사실보다, 소수의 의견이 만들어놓은 프레임에 더 쉽게 흔들릴까. 사회과학은 여기에 몇 가지 이름을 붙여왔다. 사람은 불확실한 상황에서 타인의 판단을 정답처럼 받아들이려는 경향(사회적 증거)이 있고, 목소리 큰 소수가 지배적인 의견처럼 보일 때 다른 사람들은 침묵하게 된다(침묵의 나선)는 설명도 있다.


난해한 책을 읽을 때 전문가의 해설에 매달리고, 경험해보지 못한 세대의 문화를 댓글창의 반응으로 짐작해 버리는 태도는 어쩌면 매우 인간적인 선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글에서 그 이론들을 정리하고 싶지는 않다. 중요한 것은, 그 메커니즘을 아는 것보다 내가 지금 어떤 시선을 빌려 쓰고 있는지 자각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콘텐츠는 분명 나를 구성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수많은 빌려온 시선을 함께 들여온다. 어떤 시선은 이해의 사다리가 되어 나를 한 단계 끌어올리고, 어떤 시선은 현실의 온도를 지운 채 세상을 납작하게 만든다.

같은 소수의 의견이지만 결과는 전혀 다르다. 누군가는 자신의 이름과 시간, 사유와 실패를 걸고 내놓은 해석으로 나의 사고를 확장시킨다. 반면 누군가는 익명성과 공감 수에 기대어, 몇 개의 장면만으로 세계 전체를 규정하려 든다. 나는 이 차이를 소수의 의견에도 ‘질’이 있다는 말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나는 지금 내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가. 아니면 누군가가 대신 보고, 대신 해석해준 세계를 무비판적으로 차용하고 있는가. 오늘 내가 읽은 문장과, 무심코 넘긴 댓글 몇 줄이 과연 내 삶의 어디쯤에 자리를 잡았는지 되짚어볼 필요가 있겠다. 가끔씩 이 질문을 한동안 붙잡고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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