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기쁨, 히무로 유리 작.

그리운드시소-한남, 방문기

by 비읍비읍

어느 날 아내가 말했다. 자수 관련한 전시회가 있는데 얼리버드 예매를 해놓았으니 조만간 가자고 했다. 그렇게 한 주 한 주 밀리다가 드디어 올해가 지나기 전에 다녀오게 되었다. 그라운드 시소-한남에서 진행되는 전시로 일본 작가인 히무로 유리(himuro yuri)의 '오늘의 기쁨'이라는 제목으로 진행되었다.


KakaoTalk_20251214_123104381.jpg 웰컴 투 New experience. in groundseesaw.




사전에 정보가 없이 방문한 그라운드시소는 Ground seesaw 라는 영문명으로 목적성이 뚜렷한 곳이었다. 히무리 유리님이 만든 2중 페브릭(작가의 말은 아니고, 그냥 내가 붙인 표현) 방식은 2차원을 3차원으로 바꿔주는 독특함이 있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겠으나, 글쓰기 플랫폼의 한계로 인해 최대한 글로 표현해보고자 한다. 유튜브와 틱톡이었으면 영상을 올리고, '우와~' 했으면 끝날 일이겠지만 말이다.


작품의 표현 방식은 이렇다. 거대한 캔버스 크기에 직조의 방식으로 그림들이 수놓아져 있다. 그리고 자연적인 배경 속 작은 등장인물들이 다양한 행동들을 하고 있다. 특정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토끼, 잔디 깎기 기계, 공룡 화석, 비행기, 풍선, 개구리, 나무, 사우나 등-이 자수로 짜여있다. 그 위에는 약 3~5cm 되는 간격마다 줄이 그어져있고, 줄과 줄 사이에 밑그림을 덮는 짧은 실들이 빼곡하게 바느질되어있다. 그 줄은 직선이기도, 웨이브 형태의 곡선이기도 하다.


밑그림을 덮은 실들을 가위로 잘라내는 것으로 작품이 완성이 된다.


엉기성기한 방식으로 하던 깔끔하게 잘라버리던, 모두 작품을 완성하는 방법이 된다는 점이 특히 독창적이다. 가위로 잘라내는 방식에 따라 거친 단면이 남아 독특한 효과를 가져온다. 깔끔하게 정리된 단면은 일종의 공간으로 탈바꿈이 된다. 어쩔 수 없이 아주 짧게 남은 실들은 미완성이 아니라 자연에서는 당연시되는 아주 작은 티끌들을 표현하는 것만 같다.


작가는 작품을 양산하여 사람들의 참여를 유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작가의 작품을 제 돈 주고 살 수 있는 머리가 굵어진 어른 중에 누가 함부로 작품에 가위질을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다곤 치더라도, 혹시 망칠까봐 차마 가위질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어린이에게 교육적인 측면에서 자유로운 가위질을 제안하고, 다양한 경험을 하게 하는 게 맞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경험을 대리해주는 사회에 맞게 작가는 자신의 마무리 가위질 작업을 영상으로 남겨두었다. 작가가 일필휘지의 고수처럼 가위질을 해나갈 때마다, 어떤 선에서는 차분함이, 어떤 선에서는 속도와 파워가 느껴지기도 했다. 엉성하게 잘라진 부분에서는 작은 발자국이 남기도 하는 자연의 특성이 그대로 담긴 것만 같았다. 넓은 단면을 다 잘라낸 부분은 자국이 아니라 웅덩이, 분화구와 같은 일정 규모 이상의 공간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아이디어가 참 좋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과감하게 빈칸을 남겨두거나, 엉기성기 잘라내 버리는 부분에 대해서는 어떤 시행착오를 거쳤을까 생각해 보았다. 작가의 천재적인 가위질보다, 완벽을 위해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완성본을 만들었을까- 싶어, 그 과정에 대해 경외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아내와 작품을 보면서 페브릭이라는 소재로 어찌 이런 독창성을 표현했을지에 대해 감탄했다. 페브릭이라는 소재의 질감이 주는 느낌과, 가위로 잘라서 마무리 표현하는 비정형성이 2D로 머물던 작품을 3차원의 세계로 반발자국 정도 끌어당긴 기분을 느끼게 만들었다.


글로 하는 설명은 이쯤이면 되었고, 글이 아니라 작품 사진을 보며 작가의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기록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




1. On gra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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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grass.


전시회라는 게 별다른 제재가 없더라도 작품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은 기본적인 에티켓으로 아는 상식이다. 하지만 전체를 다 보고 나니 독자 참여형이나 다름없는 것이었고, 만지작- 거리지만 않는다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부분이라고 판단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처음부터 작품에 매료되어 눈이 아주 나쁜 사람처럼 작품을 가까이서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꽤 커다란 캔버스 크기에 대상들이 자수로 짜여 있다. 3cm나 1cm 정도 되는 간격마다 직선 선라인으로 자수가 새겨져 있다. 밑그림을 숨기는 실을 바느질 하기 위한 라인으로 보인다. 잔디 깎기 기계가 지나간 길처럼 보이는 곳은 작가가 녹색 실을 가위질해서 잘라낸 부분인 것이다. 아주 깔끔하게 잘라내지 않으니 오히려 정확하다. 자연 속 잔디가 반듯하게만 잘리지 않는다는 걸 그대로 표현한 것처럼 보이게 된다. 더 자세히 보면 사람의 발바닥에 녹색 실이 채 잘려나가지 않고 붙어있는 걸 볼 수 있는데, 이건 잔디를 깎는 사람의 발이 깨끗-할 수만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극 사실주의에 해당한다.


깔끔하게 잘라내는 것과, 윗부분만 잘라낸 것들이 모여서 기다란 잔디 풀숲을 떠올리게 하고, 평면에 놓여있던 배경이 관람객 방향으로 다소 튀어나오게 함으로써 3차원의 세계로 조금 튀어나온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2. in the a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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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the air.


이번에는 하늘이다.


나는 아직까지 살면서 이토록 많은 비행기와 풍선, 새가 하늘에 가득한 광경을 본 적이 없다. 내 경험이 일천하다고 아쉬워할 만큼 이건 정말 멋진 광경임에 틀림없다.


배경이 되는 페브릭을 천장에 걸쳐놓고, 축 늘어 뜨려 놓음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경험을 선사한다. 눈높이에 그저 걸려있는 작품이 아니라서, 말 그대로 '하늘에 수놓아져 있는 광경'을 보는 기분이 든다. 관용어구적인 표현대로 하늘 광경을 자수로 수놓다니, 이것보다 더 강력한 언행일치적인 작품이 있을까.


잔디에서의 작품과 다르게 여기서는 힘과 속도가 느껴진다. 파란색 밑그림에 흰색으로 덮어놓은 작품에 가위질로 깔끔하게 도려낸 부분과, 거칠게 흰색 실을 남겨놓은 부분을 대비해서 봐보자. 부아아앙!!!! 하면서 빠르게 날아가는 비행기가 무엇인지, 평온한 하늘에 혼자만 쌩!하고 날아가는 비행기가 어느 것인지 누가 봐도 알 수가 있다. 거칠게 튿어 놓은 것만 같은 흰색 실이, 누가 가장 힘센 엔진을 가지고 있는지 가늠케 만든다. 내가 직접 이 장면을 마주하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본다. 지브리 영화 중 '바람이 분다' 주인공이 보길 바랐던 하늘의 모습이 바로 이 장면이 아니었을까.





3. around icy s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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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ound snow.


이번에는 차가운 겨울 속 바다와 얼음, 그리고 눈밭이다.


대부분 흰색으로 배경이 남아버린 작품 속에서는 개가 눈썰매를 끌고 있기도 하고, 스키를 타거나 얼음을 깨고 빙어낚시를 하려는 사람들이 나온다. 그리고 작품 가운데 사우나를 하는 건물과 난데없이 수영을 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핀란드에서의 짧은 유학생활때 전세계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사우나-라고 알려진 곳에 여행을 갔던 경험을 표현했다고한다. 사우나에서 뜨끈하게 지지다가 뜨거워진 몸으로 바로 영하 20도의 바다에서 수영을 한다는 것이다. 작가 본인은 무릎까지밖에 못들어갔지만, 바다 한가운데까지 수영을 하기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게 이렇게 작품에 표현해낼만큼 강렬한 기억인 것이다.


그 경험이 이중 페브릭이라는 방식으로 나에게 그대로 전달이 되었다. 사우나를 나와 으레 수영을 하는 사람들의 동선이 남게 된다. 한 사람만의 발자취가 아니라서 그런지 마치 자연적으로 생긴 산책로처럼, 파란색으로 변한 면적이 공간감을 준다.


얼마나 추운지 수영도 완전 화이팅있게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거칠게 남은 흰색 실들이 전혀 느긋하지 않은 수영을 가늠케 한다. 마치 발에 모터를 달아놓은 것처럼 앞으로 나가며, 파바바바박!! 하는 만화적인 소리까지 내게 환영으로 들린다. 어쩌면 쇄빙선처럼 얼음을 깨며 수영하는 초인적인 사람들의 취미생활을 내가 목격한 것일지도 모르지.




그 외에도 가을스러운 마을 분위기와, 고고학자들 같은 공룡 화석 캐기 같은 노란색이 주제였던 챕터도 있었다. 내게는 위 세 가지 챕터가 가장 인상 깊었을 뿐이다. 아마 빨간색 나뭇잎이 흐드러지게 달려있는 단풍나무를 빨간 실이 거칠게 흐트러져 있는 것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회화적인 방법은 없을 것이다. 사막처럼 모래로 가득한 곳에서 공룡화석을 붓으로 헤쳐가며 발굴하는 고고학자의 뒷모습을 샛노란 실이 엉기성기 잘려있는 것보다 더 잘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전시회라는 게 구성상 어느 파트에서는 힘이 빠지거나, 지루할 수가 있다. 하지만 이번 전시는 달랐다. '우와!'라는 감탄사를 연발하다 보니 어느새 마지막 장소인 굿즈샵에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무엇이 나를 푹 빠지게 만든 요소인지 되짚어보면서 아내와 한참을 이야기했다. 이런 생경한 경험을 더 명확하고 세부적으로 정의하지 못해 마음속이 근질거렸다. 표현력의 왕인 한글 사용자가 이러할진대, 영미권은 속 불편해서 어떻게 살겠누-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렇게 또 내 우뇌를 타격하는 좋은 전시회를 다녀오게 되었다. 완벽히 실사화되는 것만이 예술의 미래가 아니었다. 스크래치 기법에 힘과 속도를 부여하거나, 직조 방식의 페브릭이 이를 구현한다는 것은 생각해보지도 못했다. 다소 엉성한 드로잉으로 만들어진 캐릭터들과 아직 3차원으로 빠져나오지 못한 것만 같은 오브제야 말로 앞으로도 롱런할 예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애초에 예술이란 게 그런 것이겠지. 더 덜어낸 것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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