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를 굳이 찾아 나서야 하는 이유
이렇게 시의적절하게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책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경험의 멸종』은 단순히 기술을 비판하는 책이 아니다. 인간이 어떤 과정을 거쳐 ‘직접 경험’을 포기하게 되었는지를 추적한다. 그리고 그 과정이 얼마나 조용하고, 또 매끄럽게 우리 삶에 스며들었는지를 보여준다.
지난번 푸켓으로 떠난 휴가 때 나는 이 책 한 권을 덜렁 들고 갔다. 서문은 휴가를 가기 전에 읽었는데, 몸으로 직접 체험하는 휴가 때 읽기 적절할 것 같다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이테크 기술로 매개된 경험만 하는 게 일상이 돼버린 시대에, 일상에서 벗어나 직접 '경험'이라는 것을 하면서 '경험의 멸종'을 지적하는 책을 읽는다는 것은 필연적이라고까지 느꼈다.
책 제목이 주는 묵직함과 달리, 첫 장을 넘기자마자 이상하게도 ‘일기장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놓쳐온 일상적 순간들 — 사진 찍느라 놓친 대화, 화면 속 좋아요에 눌린 감정들 — 그런 잔상들이 줄마다 걸려 있었다.
책에서 경고하는 사례들처럼은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다가도, 생각해보면 나 역시 기술의 혜택을 입고 사는 사람인지라 한계에 봉착한다. 러다이트식 저항은 안 된다, 이성적으로 생각하자 — 하면서도 어쩐지 손끝이 자꾸 불편해졌다. 책은 ‘기술과 인간이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졌고, 나는 그 질문 앞에서 괜히 몸이 조심스러워졌다.
책은 1장부터 7장까지 단계적으로 논리를 쌓아올리며 독자들을 설득한다. 아니, 그저 세태를 보여주었을 뿐인데, 내게 무엇인가를 강변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만큼/그동안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피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중 내 머리를 좀 더 강하게 타격한 챕터들은 아래와 같다.
이 장에서는 ‘얼굴의 힘’ 이야기가 나온다. 사람의 얼굴, 표정, 눈빛 같은 것들이 얼마나 복잡한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해. 저자는 우리가 점점 그 언어를 잊고 있다고 말한다. 누군가의 표정을 읽는 대신, 채팅창의 이모티콘을 읽는다.
감정이 사라진 인간관계 속에서, 정작 일보다 사람이 더 피로해지는 건 왜일까. 책에서는 이런 사회를 ‘투명 인간 사회’라고 부른다. 서로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필요한 순간에만 존재를 호출하는 사회. 이 문장을 읽을 때 나는 알 수 없는 서늘함을 느꼈다. 대면의 피로를 피하려다, 결국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세상이라니.
배려가 낭비가 되고, 침묵이 결례가 되는 사회. 생각해보면 이건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다.
작가는 2장의 말미에 이렇게 정리한다.
대면 상호작용이라는 것은 익숙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매우 불편한 환경일 수 있다. 지하철에서 냄새나는 남자가 옆에 앉아 있는 경험이 깨달음을 가져다줄리는 없다. 그러나 물리적인 세계와의 이런 일상적인 만남은 서로에 대한 이해를 넓히며 강화한다.
프랑스 철학자 시몬 베유는 말했다. "관심은 가장 희귀하고 순수한 형태의 관대함이다." 물리적으로 구현된 존재로서 서로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 즉 같은 공기를 마시고, 말로 하지 않은 서로의 감정을 느끼고, 서로의 얼굴을 보고, 서로의 몸짓에 공감하는 것은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핵심 요소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주려면 그의 물리적 존재에 시간을 할애해야만 한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이라도 이런 모든 요구를 충족시킬 수는 없다.
‘왜 만나야 하지?’라는 질문이 너무 익숙해진 시대가 되서야
우리는 다시 ‘왜 만나야 하는가’를 배워야 하는 걸까.
로버트 노직의 ‘기계 속 삶’ 실험이 등장한다. 그는 이렇게 물었다.
"우리가 기계에 침습되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면, 기계가 대신 경험해주는 세상에 살 것인지 현실세계에서 인간이라는 존재로서 직접 경험을 할 것인지 선택하라. 그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지 모른다."
나는 속으로 '매트릭스 속 인간들도 아닌데, 현실에 살아야지'라고 생각하며 후자를 선택했다.
다행히 아직 노직이 염려했던 것처럼 기술이 우리 삶을 대신 살아주는 상황은 펼쳐지지 않았다. 다만 우리는 이런 기술을 통하지 않고 이런 기술이 조장하는 행동에 부응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삶의 방식을 수용하고 있다. 머리로는 선택하지 않을 삶을 자연스럽게도 이미 살고 있다.
산속에서 맨손으로 집을 짓는 사람이 촬영한 유튜브 콘텐츠를 보며 감탄한 적이 있다. 내가 살면서 산에 직접 집을 지을 일은 없으니, 대리 경험을 통해 집 짓는다는 것은 어떤 애로사항이 있는지 아주 손쉽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들 먹방 콘텐츠를 보기도 한다. 그리고 지방 곳곳의 맛집을 찾아다니며 시청자를 대신해서 먹어주고 평가하고 1등, 2등을 선별해 주는 유투버도 있다. 이 지점부터 특이점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누군가 대신 경험해 준 1등 맛집이 있어, 내가 굳이 3등 음식점을 경험하지 않아도 되게 된 것이다.
애완동물을 키우며 즐겁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현실적으로 애완동물을 키우기 어려워하는 사람들은 유튜브를 통해 대리경험&만족하곤 한다. 그래서 굳이 애완동물을 키우지 않고도 행복감만 체리피킹(cherry picking)할 수가 있게 되었다. 저출산시대에 아이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아이가 주는 행복을 영상으로 공유하는 계정은 구독자 수가 매우 높다. 아이를 낳지 않아도 아이가 주는 행복감만 일정 부분 쉽게 경험할 수 있게 된다. 내가 사고 싶었던 전자기기 중 어떤 게 최선의 선택일지 몰라 언박싱 영상과 리뷰영상을 보게 된다. 그래서 나는 실패할 가능성이 낮은 전자제품을 살 수가 있게 된다. 하지만 모두 같은 선택을 하게 된다.
내가 경험하지 않았지만, 경험한 것과 다름없는 경험을 일정 수준 이상은 손쉽게 할 수가 있게 되었다.
기술의 발전이라는 것이 일정 수준까지는 인간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면서 더 많은 담론을 만들어냈다. TV만 덜렁 있을 때 모래시계와 무한도전은 전 국민을 아우르는 공통된 주제가 되었다. 다 같이 그것을 주제로 이야기도 나누고, 각자의 생각을 나누었다.
하지만 TV를 넘어 다들 휴대폰을 하나씩 가지고 있고 지상파 방송이 아닌 OTT, 유튜브 채널, 인스타그램, 틱톡 등이 나타나며 각자를 갈기갈기 찢어버려 모두를 개개인으로 분화시켜 버렸다. 각자 집에서 무엇인가를 본다고 해서 다음날 다 같이 모여서 할 말이 남아있는가? 내가 본 콘텐츠를 공유하면 되는데 내 의견을 개진할 필요가 있게 되었는가? 오히려 오프라인 사람들을 더 만날 필요가 없는 삶이 되는 것인 것이다.
그래서 책은 말한다. 우리는 이미 그 기계 안에 있다.
쾌락을 직접 느끼지 않고, ‘기록’으로 느낀다. 여행을 즐기기보다 사진을 찍고, 식사를 음미하기보다 스토리를 올린다. 쾌락이 경험이 아니라, 증거가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그 부분을 읽다 말고, 손에 들고 있던 폰을 내려놓았다.
마침 책을 읽던 오후에 아내와 카페에 있었는데, 지금의 상태를 인스타 스토리에 올리고 싶은 욕구가 솟구쳤다. 그러나 책에서 말하는 '함께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에 집중하지 않고, 인스타 같은 sns를 통해 저 멀리 어딘가에 있는 사람들의 관심이나 좋아요를 더 갈급한다는 반증아니냐고 하는 지적' 부분을 보게 되자 휴대폰을 내려놓게 되었다. 인스타 스토리를 올릴 준비까지 다 해놨는데, 내가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지금 읽는 책에서 얻는 교훈을 지금 당장 해내야 하는 게 아니겠는가.
사진을 찍는 것도 그렇다. 나는 아내가 무엇인가를 하거나 옷을 입을 때 사진을 찍곤 했다. 하지만 그렇게 무의식적으로 찍은 사진들은 그냥 사진첩에 남게 된다. 저장공간이 512GB인 휴대폰을 쓰고 있는데, 매일 20가지의 상황마다 연속촬영으로 10~50장씩 찍어도 3~4년간은 용량 부족문제를 겪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갤러리 어플을 뒤적이며 사진을 정리하며 다시 들여다보는 그런 기록적인 행동은 한동안 하지 않을 것이다. 그냥 그 순간을 카메라에 담는 습관적 행동이 발현된 것으로, 그저 거세한 강아지의 무의식적인 반복 행동만 남은 것과 다름이 없다.
그래서 사진을 찍지 않고 아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내가 사진으로 찍었기에 '응 사진 찍었네'하며 넘겨버린 아내의 디테일은 무엇이 있을지 쳐다보았다. 사진을 툭 찍을 때는 못 느꼈던 것들이 많았다. 아내가 자주 입던 바지를 쳐다보았다. 허벅지는 좀 붙는데 종아리는 나팔바지처럼 좀 넓어져서, 말라 보이는 게 아니라 날씬해 보이는 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옷가게에 들러 아내가 옷을 볼 때는 어떤 순서로 옷을 살펴보는지도 알게 되었고, 그녀의 시선이 머무는 속도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옷이 마음에 들 경우 어느 시점에 가격표를 조심스레 들춰보는지 까지도 말이다.
아내의 바지 핏, 손끝의 속도, 웃을 때 고개가 살짝 기울어지는 방향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사진 속에선 결코 보이지 않던 것들이다. 아마 노직이 말한 ‘기계 밖의 삶’이란 이런 거겠지. 불편하지만, 살아 있다는 증거로서의 불완전함이 아닐까.
이 장은 소제목부터 마음이 쓰렸다.
‘소멸하는 장소’.
책은 말한다. “우리는 이제 같은 공간에 있어도 함께 있지 않다.”
공공장소에서의 부딪힘, 우연한 대화, 어색한 침묵이 사라졌다.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개인화된 공간’ 안에서 안전하게 살아간다. 하지만 그 안전함이 언제부터 이렇게 공허해졌을까.
예전에 광장을 지나는 사람들은 부딪히지도 않고 빠르게 각자가 갈길을 갔다. 그들이 엉키면서, 엉키지 않는 것은 마치 안무(콜레오그래피)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각자가 단절되어 개인화가 되어 갈수록 부딪히는 경우의 수가 늘어나고 광장을 걷는 군중들의 이동 속도는 현저히 감소하게 되었다. 그렇게 개인화된 공간이 늘어날수록 우리 공동체는 더욱 느려지고 곧이어 멈추게 될 것이다.
물론 개인은 존중을 원하고, 얻을 수 있으며, 그럴 자격이 있다. 그러나 존중을 스스로에게 주는 것은 대체로 불가능하기에 다른 사람에게서 구해야만 한다. 그런데 다른 사람과 연결이 되지 않고, 피상적이면서 연대되지 않은데 대면 상호작용의 기술은 낮아진다면? 필연적으로 타인에게 받아야만 하는 존중이라는 것은 어디서 나올 수 있는 것일까?
내가 누군가에게 주지 않을 것이니, 누군가도 나에게 줄 수가 없는 세상이 되는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연결되어 있지만 고립된 인간관계를 경험하는 세대라는 게 너무 느껴졌다.
나는 일적으로 사람을 만나야 한다. 기업이나 산업을 분석할 때, 각종 자료와 기사만으로도 많은 것을 해낼 수도 있다. 하지만 관련업 종사자를 만나거나, 나보다 먼저 해당 기업 및 산업을 분석해 본 사람을 만난다는 건 업무의 효율 측면에서 굉장히 큰 차이를 만든다. 그리고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봐야 공개된 정보 이면의 것들을 내가 알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모든 것을 혼자서 A to Z로 찾아 헤맬 수는 없는 것이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야 그들이 읽은 기사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그들이 관심 갖는 분야는 어디며, 그 분야의 기업은 어떤 특색을 가지고 있어서 앞으로 전도유망한 것인지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대면하고 직접 경험한다는 것은 부유층의 특권이라는 일각의 분석에 대해서도 여러 생각을 하곤 했다. 하긴 돈이 있는 사람들은 해외여행도 나가고, 골프도 치고, 친구들도 만나서 밥도 먹고 시간도 보내고 하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유튜브에 넷플릭스로 여행을 떠날 수밖에 없다. 이토록 저렴한 여가활동을 그저 변화된 시대상이라고만 보도하고 있지 않던가.
하지만 이 책에서 말하는 말하는 것처럼, 그것을 특권적 행위라고 선을 긋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기술이 경험의 멸종을 만들어 내는 와중에, 비효율적이거나 뜻밖의 무엇인가가 있을 수도 있는 불편한 대면관계와 장소의 소중함을 특권층의 것으로 팔아넘기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면 행위를 특권층의 것으로 미루지 않고 우리가 생각을 고쳐먹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혼란에 저항하라.”
나는 이 문장을 오래 붙들었다. 이 책이 나에게 남긴 건 단순한 불안이 아니라 태도의 전환이었다. 무엇이든 효율적으로 해결하려는 습관을 잠시 멈추고, 조금은 낭비하고, 조금은 어색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문장.
나는 여전히 기술의 세계에 살지만, 적어도 이제는 알 것 같다. ‘살아 있음’은 완벽하지 않은 순간에 있다.
그리고 그 불완전함이야말로 우리가 저항해야 할 방식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