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시간이 후다닥
골프를 시작하고 처음 필드에 나간 건 3개월차였다. 9개월차에 다섯 번째 필드를 나갔을 때 주변에서 모두 이렇게 말했다.
1년도 안 됐는데 이 정도면 금방 싱글 하겠는데?
2~3년이 지나 실력이 조금 올랐다. 잘 칠 때는 3개월차보다 확실히 잘 쳤지만, 못 칠 때는 3개월차랑 똑같았다. 변동성이 여전히 심했다. 그때 먼저 말하는 편이 낫겠다 싶어서 선수를 쳤다.
본격적으로 친 지는 이제 6개월 됐습니다.
그러면 이런 반응이 돌아왔다.
2~3년 치면 싱글 하겠네. 거리가 어마어마한데.
5년이 지난 지금은 실력도 올라가고 변동성도 줄었다. 안정적인 NN대 골퍼로 자리를 잡았다. 이제는 이런 말이 뒤따른다.
5년 됐다고? 필드 자주 나오면 정말 잘 치겠다. 근데 싱글은 시작하고 2~3년 안에 바짝 달성해야 가능한 거지, 엣헴.
어느 순간부터 "아직 얼마 안 됐습니다"라는 말이 방패가 아니라 족쇄가 된다. 스스로를 N개월차라는 울타리 안에 가둬두는 순간, 그 안에서의 성취는 귀엽고 실수는 용납되지만, 그 이상의 무게감은 영원히 유예된다. 이직 후 8개월차가 된 지금, 슬슬 그 배리어를 걷어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이직하고 6개월이 훌쩍 지났다. 그래서 지금은 사실 8개월차다.
일을 통해 경력을 쌓아가는데 년-단위로 이야기를 하는데는 이유가 있다. 1년단위의 거대한 흐름을 한번은 돌아본다는 것 부터가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1달 로그 이후 6개월 로그를 쓰게 된데에는, 이곳의 싸이클은 꼭 연단위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다.
올해 들어서 1,2,3월은 정말로 바쁜 시간의 연속이었다. 그렇다고 4월은 널럴했나? 역시나 바빳지만 그래도 1주일에 2번은 외부 저녁 일정을 진행해도 될 정도는 되었다.
한번은 그런 생각을 했다.
차분- 하게 앉아서 재미나이, 클로드와 함께 정보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며 서로의 삼단논법을 펜싱의 칼처럼 활용해서 딜을 검토하는 상상말이다. 그 상상 속에서 필요에 따라서 바로 구글링과 회사 대표님과 Q&A, 함께 검토하고 있는 기관의 새로운 뷰- 등을 참고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하지만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러면 너무~ 좋겟다고 생각할정도로 일이 동시다발적으로 돌아가고 있었고, 마무리된 줄 알았던 일들이 질질 끌리며 끝나지 않은 일로 나를 쫓아오고 있었다. 그 와중에 쏟아지는 새로운 일들을 마구 받아들였는데, 이는 기존의 일들이 잘~ 마무리 될줄 알고 내가 가능할것 같다는 오판으로 받아들인 탓이었다.
그 와중에 대표님들이 펀딩하는 과정을 어깨넘어로 보러 간다거나, 그들이 만나는 임원급들과의 미팅 자리 말단에 자리를 해본다던지- 하는 시간을 가지니 하루 24시간이 모자랐다.
아 물론 6시간은 필수로 자고, 아내랑 가끔 시간도 보내야하는것을 제외한 시간이 빠듯했다
이직한지 정확히 6개월이 되던 '26년 2월말에 지금까지 진행된 상황들을 프로젝트별로 썰 풀며, 브런치스토리에 '이직로그 6개월차'를 구구절절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시점에는 아무것도 안끝났고 오히려 매일같이 야근하느라 경황이 없었다.
투자심사보고서를 작성하고, 투자논리를 세우고, 대표님들의 Q&A를 대응하면서, 내가 검토하는 딜이 진짜 좋은 딜이 맞았는지 눈이 빠져라보고있었다.
피아 식별만 하면 되는줄 알았더니, 내 자신이 두 갈래 분열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출근할때는 매우 좋은 딜인 것으로 마음의 결론을 내렸다가, 점심에는 너무 허술한 부분이 많다고 판단하여 드랍해야할 것같다가, 퇴근하기 직전에서야 회사의 강점을 제대로 체크업하고 내 논리를 일원화했더니, 퇴근길에 운전하는 그 짧은 시간에 가상의 RED TEAM이 나를 계속해서 괴롭혔다.
좋은거 맞아? 안좋은지 아닌지 검토해봐야하는거 아니야? 딱보면 리스크 안보이나?
아, 이거 누군가 계속해서 머리속에서 외치고 있는 것만 같아.
폭풍같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조금의 시간이 나서 그간의 일들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현재까지 투자를 2건 마무리했고, 1건은 납입만을 앞두고 있으며, 1건은 납입만 남은줄 알았더니 최종적으로 드랍될 상황에 놓였다(?). 그리고 계속해서 검토하던 딜 중 2개는 조만간 드랍 또는 간보기 연락을 해야할 상황이고, 2개는 긍정검토로 '강변'해야하는 입장에 놓였다.
그 와중에 최근 2주동안 총 6곳의 신규업체 미팅을 진행했는데 머리가 혼란스럽다.
나는 4개에 대해 자체 드랍했지만 간략하게 대표님께 진행상황 보고를 했더니 그 두개를 픽업해서 긍정검토로 돌리자는 의견을 주셨다. 나머지 2개는 딥하게 보면 긍정적으로 풀 수 있겠지만 헤쳐나가야할 난이도가 너무나도 높은 상황이었다. 회사만 좋다고 되는게 아니라 계약 구조와 향후 사후관리 방식, 기존 주주와의 교통정리까지 첩첩산중이다. (지끈)
그동안 이도 저도 아니게 투자 논리를 가져가봤더니 승률이 좋지가 않다. 안그래도 나도 긍정/부정이 긴가민가한데, 나보다 훨씬 얕게 들여다본 사람들은 얼마나 더 불안하겠는가. 내 검토 결과 긍정적인 측면이 더 부각되어야한다고 판단된다면, 나의 레드팀을 꿀먹은 벙어리로 만들 수 있게 '강변'하는 내가 되어야할것이다. 그만큼 철저한 조사와 분석이 뒷받침되어야겠지만 말이다.
차분히 뭔가를 정리할 상황이 아니다. 지금 시점에서는.
그래서 프로젝트별로 후기를 쓰는 방식으로 작성하진 않을 예정이다.
왜냐!?
딜이라는게 투자의사결정에서 끝나는게 아니라 이후 사후관리부터 고려해야할 변수들이 정말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지금 설레발 치면서 잘될꺼 같다는 둥, 투자의사결정까지의 과정이 이렇게 힘들었다는 오바를 할 필요가 없겠다. 더 힘들고 더 변수가 큰건 이제부터 시작이니깐 말이다.
이렇게 딜 하나 하나에 모든 역량과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데, 딜을 엑싯까지 끝내는 시점에 내가 어떤 과정을 겪어왔는지 까먹을리 만무하다는 확신이 생겼기 때문이기도 하다. 추후에 해당 딜을 잘 엑싯하고나면 투자부터 사후관리 엑싯까지 하나의 프로젝트로 묶어서 그때 후기를 남기는게 아름다울것 같다.
힘들고 정신없는 일만 있는게 아니다.
부단히 새로운것과 첨단에 관심을 가지고 싶어했던 내게 너무 딱 맞는일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AI 자동화와 생산성 증대의 패러다임 속에서는 더 그렇다.
딱! 내가 딱 ! 맞는 시기에, 딱!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는/할수 있는것이라고 생각이 든다. 물론 발맞춰 뛰는게 마냥 수월하고 능히 해낼만한건 아니지만 말이다. 적어도 내 발목을 잡거나 태클을 걸기위해 호시탐탐 노리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환경은 아닌 것 같다.
그리고 좋은 그룹에 와있다고 생각이 든다. 심적으로 받아들이긴 어렵지만, 나는 늘 내가 가장 꼬리인 조직에 속하길 바랬다. 물론 나 역시도 열심히 살아가고 있긴하지만, 내가 머리인 조직은 너무 그 깊이가 얇지 않은가? 그런데 열심히 살아온 사람들이 모여서 > 현재도 열심히 살며 > 그 와중에 능력이 탁월하기까지 한데 > 룰루랄라 잘 놀기도하고 > 외형적으로 훌륭하기까지 한 사람들이 이 그룹에는 정말 많다.
(우리 회사 말고, 이 업계 전반적으로..)
이제껏 내가 속했던 우물에서는 '나정도면 뭐~'라고 할 수 있는 건덕지들이 정말 많았는데, 지금은 내가 얼마나 잘 해내고 있는지 부단히 증명할 때다.
금방 이직 후 1년이 될 것만 같다.
작은 성취에도 자신을 다독일 수 있던 N개월차 이직맨이 아니라, 일정 수준의 성과를 해내야하는 N년차 업계 속 1인분이 되기 위해서 시간이 빨리 갈 수 밖에 없겠다.
다시 한번 혼돈스러운 머리속 생각을 다잡고, 진행되고 있는 딜 파이프라인을 정리해서 교통정리를 하고, 강변할 것은 강변하고, 유연하게 리스크를 받아들일것은 받아들이고 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조만간 더 차분히 근황을 정리할 수 있는 호재 중의 호재를 만나게 되길 바라본다.
골프에서 싱글은 "초반에 바짝 해야 한다"고들 했다. 어쩌면 맞는 말일 수도 있고, 어쩌면 그 말 자체가 늦게 시작한 사람을 미리 단념시키는 언어일 수도 있다. 지금 하고 있는 일도 비슷하다. N개월차라는 유예기간은 끝났고, 이제는 그냥 하는 것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