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유학생의 시카고 여행(1)
매일매일 반복되는 학교 생활
미국 친구들과 나 사이에 있는 보이지 않는 벽
내가 선택한 유학생활이었기에 가족들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잘 해내는 모습을 보이고 싶다는 부담감
생각하는 것을 말로 옮길 때마다 오는 어려움과 불편함
뭔가 먹긴 하는데 한 끼도 제대로 챙겨 먹은 것 같지 않은 느낌
계속 누적되는 피로감과 스트레스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이 나를 꾹 누르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내 생활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나의 내면 안에서는 폭풍우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누구도 내 어려움을 대신 견뎌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하루하루를 버티자 견디자 하는 마음으로 지냈던 것 같다.
그나마 내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야기한다고 해서 그들이 내 어려움을 대신 짊어져 줄 수 없다는 걸 알았지만, 내가 잠깐이나마 짐들을 내려놓고 쉬어갈 수 있는 쉼터가 되어주었다.
그렇게 추수감사 주간이 되었다.
미국의 추수감사 주일은 한국의 추석 개념과 비슷한 것 같다. 나라 전체의 큰 공휴일인 동시에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음식과 감사를 나누는 그런 시간이다. 우리가 추석에 가족들과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 모여서 명절 음식을 해 먹고 함께 시간을 보내듯이, 국제학생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학생들이 가족 행사를 위해 집으로 돌아간다. 국제학생인 나는 당연하게도 미국에는 돌아갈 집이 없다. 다른 친구들이 짐을 챙겨서 부모님 차에 오르는 모습을 보니 나도 우리 가족이 더욱 그리워졌다.
집에 가지 못하는 대신 나는 친한 한국인 언니와 함께 시카고 여행을 계획했다. 내가 학교를 다니고 있는 밀워키에서 시카고는 그리 멀지 않다. 기차를 타면 한 시간 반이면 도착한다. 한국으로 치면 가까운 거리는 아니지만, 워낙 땅 자체가 큰 미국에서는 기차로 한 시간 반이라는 시간은 오랜 시간으로 여겨지지 않는 것 같다. 물론 차로 가면 고속도로를 타고 더 편하고 쉽게 도착할 수 있겠지만, 나와 언니는 차가 없는 초짜 병아리 유학생인 관계로 기차를 택했다. 나는 오히려 좋다고 생각했다. 내가 지금 아니면 미국 기차를 이용할 기회가 또 있을까. 기차 가격도 비싸지 않았다. 편도로 $25 정도. 우버 한번 타는데도 기본 $13 이상은 내야 하는데, 이 정도 가격은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학기 초반부터 시카고 여행에 대해서 이야기했지만, 개학한 때부터 땡스기빙 주간 방학이 한참 남았다고 생각하니 과제를 해야 한다느니, 아직 시간이 남았다느니 이런저런 핑계로 여행 계획이 잘 세워지지 않았다. 이렇게 가다간 시간이 훌쩍 지나서 시카고 근처에 가보지도 못 보고 끝나겠다 싶어서, 일단 숙소와 기차 시간을 예약했다. 기차는 위에 잠깐 이야기한 대로 Amtrak을 타고 Milwaukee downtown (Intermodal Station)에서 Chicago(Union Station) 행 기차로 예약을 했다. 숙소 같은 경우에는 언니가 인터넷을 샅샅이 뒤져서 시카고 다운타운에 위치하면서, 그나마 가장 가격이 저렴한, 분리된 두 개의 침대가 있는, 무엇보다 깨끗한 호텔을 찾았다. 우리가 예약했던 호텔은 River Hotel이다. 호텔은 호텔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깨끗하고 기본적인 어메니티를 갖추고 있었다. 무엇보다 시카고 다운타운의 대표 건물 중 하나인 옥수수 타워와 트럼프 타워가 보이는 리버뷰라서 참 좋았다. 그러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생각했던 것보다 방의 크기가 작았다. 방 크기를 생각하면 그냥 호텔이라기보단 비즈니스호텔 같은 느낌이었다. 또한 지금 코로나로 인하여 룸 클리닝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는 한 숙소에서 6박을 하는 입장이다 보니, 이 점이 제일 불편했다. 우리가 추가적인 수건이나 어메니티가 필요할 때마다 프론티에 문자나 전화를 해야 했는데, 연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져다주지 않아서 3번씩이나 다시 연락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 부분은 코로나로 인하여 투숙객들이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하는 부분인 듯하다.
우리 학교의 땡스기빙 방학은 땡스기빙 주간의 수요일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나는 화요일 수업이 점심 좀 지난 시간쯤에 끝나고, 언니는 화요일 수업이 아예 휴강되어서 우리는 화요일 오후에 일찍 출발해 버렸다.
사실 여러 가지 이유로 나에게 시카고는 미국에서 가장 가보고 싶은 도시 중 하나였다. 마침 밀워키와도 별로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기에 더더욱 가고 싶었다. 그러나 학교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서 나름 열심히 고군분투를 하면서 시카고 여행에 대한 기대는 점점 사라졌다. 여행을 가는 화요일, 마지막 수업이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부터 여행에 대한 기대가 급속도로 부풀어 올랐다. 내가 한국에서 영상으로만 보던 도시를 직접 가는구나, 그것도 오늘! 가벼운 발걸음으로 기숙사에서 짐을 챙겨 언니를 만나고 역으로 향했다.
기차를 타고 시카고로 향하는 동안 지나가는 뷰가 한국의 기차 뷰와 뭔가 다를까 싶었지만, 별로 다르진 않았던 것 같다. 사람이 별로 없는 광활한 밭 뷰.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기차를 타고 가는 내내 한 번도 터널을 통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그 넓은 땅에 산이 하나 없었다. 항상 한국에서 집 가는 기차를 탈 때마다 밖에 뷰를 보면서 생각에 잠길 때쯤이면 어두운 터널이 자꾸만 방해를 했는데, 미국 기차를 타니 멍 때리는 나를 방해할 요소가 없었다. 방해 요소가 사라지니 좋았지만, 익숙한 산들이 없는 넓은 대지의 모습은 조금은 허전하게 느껴졌다.
시카고에 도착하는 동시에 나를 반기는 것은 크고 높은 건물들이었다. 내 생각에 조금 더 자연 친화적인(?) 밀워키와 다르게 빽빽하게 건물이 들어서 있는 시카고 다운타운의 모습을 보니 또다시 설레기 시작했다. 크고 높은 건물보다 산과 물, 그리고 조용한 동네를 더 선호하게 된 나였지만, 오랜만에 연말의 분위기와 함께 반짝이는 도시의 모습을 보니 오히려 숨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6박 7일의 시카고 여행 동안 시카고 다운타운 주변의 명소, 맛집들을 돌아다녔다. 차이나 타운을 제외하고 다운타운 밖으로 나갈 일이 없었기에, 전철과 기차를 한 번에 이용할 수 있는 벤트라(Ventra) 카드를 이용했다. 처음 카드를 등록할 때 $5를 내야 하지만, 핸드폰 앱에 내 카드를 등록하면 처음 냈던 그 돈도 충전요금과 함께 사용 가능했다. 밀워키에서도 항상 버스를 타고 돌아다녔기에 시카고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은 우리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시카고 여행을 다녀온 시점에서 이 벤트라 카드를 더 이상 사용할 일은 없지만, 다시 갈 시카고를 위해서 지갑 속 깊이 넣어두었다.
호텔에서 짐을 푼 후 우리의 계획은 그렇게도 유명한 '시카고 피자'를 먹으러 가는 것이었다. 시카고에서 먹는 시카고 피자는 얼마나 다를까 싶어서 첫날 첫 끼에 계획한 것이었는데, 그 계획은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우리가 머무는 호텔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지오다노스(Giordano's)라는 시카고 피자로 유명한 체인점이 있었다. 그날 나는 수업시간과 시카고 이동시간이 애매하게 걸려서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한 상태였다. 피자를 먹을 생각에 꾹 참고 가게에 도착했는데, 그 지점만 코로나로 인하여 딜리버리나 픽업만 가능하다고 하는 것이다! 다른 지점의 쿠폰을 주면서 그곳에 가면 가게 내 식사가 가능하다고 했지만, 이미 배가 너무 고파진 나와 언니는 자꾸만 딜레이 되는 버스 시간을 기다릴 힘이 없었다. 구글맵을 켜서 가장 마음에 들어 보이는 곳을 찾아갔다. 우리가 찾아간 곳은 The Berghoff Restaurant라는 독일 레스토랑이었다. 식당은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만족스러웠다. 연말이라고 레스토랑 내부에 모두 크리스마스 장식이 되어있었는데, 그 장식들이 레스토랑의 분위기를 더 따뜻하고 로맨틱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물론 밀워키 물가와 비교해서 음식은 비쌌지만 그곳에서 음식과 분위기 모두 좋았기에 나름 만족스러운 저녁시간을 보냈다.
첫날의 해는 이미 졌기에 저녁을 먹은 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스타벅스에서 여유롭게 나는 따뜻한 핫초코, 언니는 시원한 티를 한잔씩 마셨다. 연말이 가까워진 스타벅스의 분위기는 그 자체로 따뜻했다. 따뜻한 온기를 머금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시카고 극장에 잠깐 들렸다. 사진으로만 보던 극장의 불빛이 내 눈앞에서 반짝이는 모습을 보니 진짜 내가 시카고를 왔다는 것을 실감했다. 한국 극장과는 다른 극장의 모습에 새삼 신기했고, 예쁜 외관에 나는 안에 들어가지 않고 그저 겉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이렇게 나의 시카고 여행 첫날은 마무리되었다. 오후에 시카고에 도착했기에 크게 한 일은 없지만, 가장 설레고 행복했던 날 중 하나로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날, 시카고 여행이 시작되는 동시에 내가 미국에 온 이후 겪었던 어려움과 외로움을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최근에 다른 나라를 여행하는 것과 그곳에서 살아내는 것은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여행은 그저 이방인으로서 그 도시의 아름다운 모습만 눈에 담을 수 있지만, 살아내는 것은 그 도시의 한 부분으로서 살아내야 했다. 매일 맛있는 음식과 예쁜 풍경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곳의 음식이 물려서 더 이상 먹기 힘들 때도 있고, 매일 비슷한 하루를 반복하는 것이 지루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내가 유학을 하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새로운 환경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환경은 생각보다 적응하기 어려웠고, 다양한 경험은 때때로 나를 더 움츠리게 만들었다. 짧은 기간 동안 정말 힘들었고, 앞으로도 힘들 것이지만 그렇다고 매일 힘든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 공부하고 살아갈 때 친구들을 만나서 스트레스를 풀고 여행을 하면서 새로운 힘을 충전했던 것처럼, 이곳에서도 나는 나를 지지해 주는 사람들을 만났고, 새로운 힘을 충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때마다 있었다. 이번에 나에게 큰 힘을 실어준 가장 큰 원동력은 이 시카고 여행이었다.
미국에서의 첫 학기는 힘들었지만 견디길 잘했고, 앞으로 남은 학기도 나는 분명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시카고 여행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