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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림 자객 Nov 18. 2023

엇갈린 운명

은지화 미술 동아리

사춘기 시절 오래 짝사랑하던 아이가 있었다. 남녀공학이라곤 해도 반이 다르고 교실도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말 한마디 제대로 해볼 기회조차 없었다. 정확히 기억하건대 현관이나 화장실을 오가다 정면으로 그 아이를 마주친 기억이 3번 있을 뿐이다. 그 시간이 0.3초쯤이나 될까? 그러니 총 합쳐봐야 그녀와의 조우는 평생 1초가 될까 말까다. 이 찰나의 시간만으로도 짝사랑이 될 수 있으니 놀라울 따름이다. 정말 바보 같은 일이지만 핑계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고3 대학입시를 눈앞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한눈 팔 틈이 없고 공부에 매진할 때라고 스스로 채찍질했다.


입시도 끝나고 겨울방학이 되었을 때 편지를 한 장 보낸 적이 있다. 물론 발신인도 없고 애절한 사랑 고백 같은 얘기도 없었다. 혹 너무 놀랄까봐 그 아이에 대한 나름의 이상한 배려였다. 졸업식 날을 디데이로 잡았다.


그리고 그 날이 왔다. 핑계거리도 완전히 없어졌으니 적당한 틈을 봐서 사진이라도 찍자는 말을 걸려고 내심 작정을 단단히 했다. 그런데ᆢ 그 틈이란 게 말이다. 졸업식에 찾아온 내 친구들과 어울려 사진을 찍을 때는 내가 틈이 없고, 그녀가 자기 친구들과 어울릴 때는 그녀가 틈이 없었다. 그렇게 틈만 보다가 어느 틈엔가 교정에서 그녀의 자취는 사라졌다. 이후로 오래도록 그녀를 잊지 못했으나 마주칠 기회는 영영 없었다. 그 날 용기를 내 말을 걸었다면 어찌되었을까? 기회의 순간, 잠깐의 머뭇거림으로 엇길린 운명이 되기도 한다. 다시 궁금해진다. 그게 정말 망설임 때문이었을까, 어차피 엇갈릴 운명이었을까?  


https://cafe.naver.com/eunjihwa


● 엇갈린 운명 mixed fate, 44cm×33cm, 은지화 acrylic on foil, (8M) 호일아트(은지화)~ 쿠킹 호일에 한지를 배접한 다음 다양한 독자적 기법을 써서 그린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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