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은 ‘각별히 챙겨보겠다’고 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방문한 부산 타운홀 미팅에서 ‘제작극장’이 언급된 이후, 공연예술계가 오랜만에 공론의 장에서 주목을 받았다. 해당 영상은 이틀 만에 31만 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했고, 유튜브 댓글뿐 아니라 페이스북 등에서도 찬반이 교차하는 글들이 이어졌다. 논의의 핵심은 결국 “그래서, 제작극장이 정확히 뭔데?”라는 질문이다.
https://youtu.be/GhgKB6beVrE?si=K_ejb_NPCwXPnQMI
제작극장은 무대극(오페라, 뮤지컬, 연극, 무용 등)을 중심으로 공연을 직접 기획·제작하는 극장이다. 단순히 무대를 빌려주는 플랫폼이 아니라, 창작부터 상연까지 모든 과정을 주도하는 제작소이며, 상시 고용된 앙상블과 제작 인력을 기반으로 운영된다. 문제는 이 ‘상시 고용 앙상블’이라는 개념이 한국의 국공립 예술단체에 대한 불신과 맞물려 오해를 낳는다는 점이다. 낮은 공연 횟수, 폐쇄적인 오디션, 정체된 인사 구조로 비판받아온 기존 단체들의 이미지 때문에, ‘상주 예술가’는 곧 ‘독점’이라는 부정적 인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동일하게 높은 비율의 공적 자금으로 운영되는 독일 제작극장의 상주 앙상블은 한국의 사례와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며 독일식 제작극장을 소개해 왔다. 독일 제작극장 예술감독의 임기(보통 3~5년)에 따라 앙상블이 재구성되고,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1년 단위 계약을 체결한다. 예술감독의 기획 방향, 동료와의 협업, 극장의 평가 등을 바탕으로 재계약 여부가 결정되는 방식이다. 예술가들은 안정적인 정규직보다는 ‘전문적인 임시직’에 가까운 형태로 일하며, 동시에 시즌 단위의 협업 속에서 책임감과 소속감을 공유한다.
이러한 고용 구조는 엄밀히 말하면 안정된 고용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예술가가 극장의 장기적 목표와 비전을 함께 설계하고 지역 사회에 기여하는 주체가 되도록 유도하며 예술가를 성장 훈련시킨다. 독일 제작극장은 이러한 맥락에서 ‘상시 고용’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따라서 인력 채용 구조가 ‘특권 혹은 독과점’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상시 고용은 지역 예술의 지속 가능성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독일에 140여 개의 제작극장이 존재해 예술가들의 이직과 순환이 가능하다는 점도 이 제도를 뒷받침한다.
제작극장은 예술가만을 위한 기관이 아니다. 조명, 음향, 무대기술, 분장, 의상, 홍보, 교육, 마케팅, 기획 행정 등 다양한 직군이 긴밀히 협력하는 복합 생태계의 중심축이다. 실제로 한 중소형 제작극장이 원활히 운영되기 위해서는 예술가 포함 300~350명 이상의 상시직 및 정규직 인력이 필요하며, 이들이 담당하는 노동은 고도로 전문화되어 있다.
독일의 표준 제작극장은 보통 3~4개 장르를 포괄하며, 운영비의 85% 이상을 공공 재정으로 충당한다. 이 높은 비율은 제작극장이 공공재로 기능하는 기반이며, 지역 주민의 문화 접근권을 보장하는 장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권력의 개입 없이 예술적 자율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극장이 주정부와 시 감독 기관의 관할 아래 있지만 독립 법인(재단, 유한회사 등)의 형태 등 여러 법적 형태를 갖추고 있어 다양한 사례를 비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예술의 자율성을 헌법적 가치로 보장하는 사회적 합의가 있는 요인도 작용한다.
극장 운영은 예술경영 전문가들이 주도하며, 정기적인 외부 감사와 성과 보고를 통해 재정의 투명성 또한 확보된다. 이처럼 정치적 개입을 최소화하면서도 공적 책임을 실현하는 시스템은 독일 제작극장의 핵심이다. 문화 연방주의 하에서 주(州)와 지방정부가 재정의 주체가 된다는 점도 중앙정부의 정치적 입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배경이 된다.
노동조건 역시 세분화된 단체협약을 통해 제도화되어 있다. 예를 들어, 무용은 주 37시간, 오케스트라는 주 10회 이하의 직무(1회당 2.5~3시간), 무대기술직은 일반 공무직과 같은 주 39시간 근무로 규정된다. 이처럼 장르별 직무 특성과 노동 강도를 반영한 주당 근무시간은 예술도 노동이라는 인식을 구체화한 사례이며, 예술가들의 권익을 보장하는 제도적 기반이다.
독일의 제작극장은 직업 교육(아우스빌둥)이 병행되는 실질적 교육 현장이기도 하다. 특히 무대기술과 제작 분야는 현장성과 교육이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어, 청년 일자리와 지역 고용 순환에 기여한다. 또한, 상주 앙상블 중심의 운영이지만 전체 제작의 20~30%는 외부 연출가, 객원 지휘자, 객원 예술가, 무대 디자이너 등과의 협업으로 진행된다. 민간단체의 성공적인 작품을 대관을 통해 재공연 하거나 순회공연 형식으로 재편성할 수 있는 구조 역시 열려 있다. 이처럼 제작극장은 폐쇄적 시스템이 아니라 민간 제작력의 기회와 육성하는 공공 인프라로도 기능한다.
제작극장은 단순한 예술가의 공간이 아니라, 무대극이라는 장르를 구현하는 공공 제작소이며, 지역사회의 문화적 역량을 축적하는 열린 플랫폼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름뿐인 ‘제작극장’이 아니라, 도시별 맞춤형 설계와 실행 가능한 정책, 그리고 긴 호흡의 로드맵이다.
제작극장은 어느 도시에, 어떤 방식으로 도입되어야 하는가?
대도시에 적합한가, 아니면 소멸 위기의 중소도시에 더 필요할까?
복합 예술극장인가, 연극·무용 중심의 중소형 극장인가?
대관과 제작은 분리되는가, 병행되는가?
상주 앙상블이 전제되는가, 아니면 순환형 위탁 제작 구조가 바람직한가?
정답은 하나가 아닐 것이다. 다만 현재 독일 제작극장의 예술경영 현장에 있는 사람이자 한국의 공연예술계에서 제법 안정적인 직업연주자였던 경험을 바탕으로 상주 앙상블, 다장르 레퍼토리 운영 방식, 높은 공적 자금 비율을 특징으로 하는 ‘독일식 레퍼토리 제작극장’을 하나의 해법으로 제시한다. 이는 이재명 정부가 추진하는 지역 균형발전 전략과 맞닿아 있다고 본다. 지금 필요한 것은 다양한 형태의 제작극장을 현장 또는 현지에서 경험한 이들의 의견을 폭넓게 수렴하는 일이다. ‘제작극장’이라는 이슈, 그리고 대통령의 “각별히 챙겨보겠다”는 발언이 공연예술계의 실질적인 논의와 실행으로 이어지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