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10] 제작극장 상연 방식, 왜 구분이 필요한가

En-suite, Stagione, Repertoire

by Arete

최근 몇 년 사이, 국내 공연예술계—특히 대관극장을 중심으로—“레퍼토리 시즌제를 도입하겠다”는 기사들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이는 주로 연간 공연 계획을 사전에 편성·공개하는 ‘시즌제’ 도입의 일환으로 보이며, 제작극장과 연계하여 “전속 단체의 신작과 검증된 레퍼토리를 묶어 연간 프로그램을 구성한다”는 의미로 쓰이곤 한다.


이 표현은 겉보기에 한 해 공연 프로그램을 미리 확정해 발표한다는 의미로, 즉 ‘상연 목록(repertoire)을 연 단위로 운영한다’는 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는 ‘레퍼토리’의 사전적 의미, 즉 언제든 상연할 수 있도록 준비된 곡목이나 목록이라는 정의에 비추어 보면, 크게 어색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개념의 혼동이 생길 수 있다. 국제적, 특히 유럽에서 통용되는 제작극장 시스템에서 ‘레퍼토리’는 단순한 작품 목록이 아니다. 극장이 여러 작품을 상시적으로 창작·보유·관리하며, 이를 교차적으로 반복 상연하는 운영 방식 자체를 가리킨다. 특히 독일, 오스트리아 등 독일어권 공공극장에서 이 시스템은 “레퍼토리극장(Repertoiretheater)”이라는 명칭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 개념에서의 레퍼토리는 곧 극장의 정체성과 운영 철학을 반영한다.


이처럼 ‘레퍼토리 시즌제’라는 표현은 사전적 의미로는 가능하지만, 그 말이 마치 레퍼토리 상연 시스템을 의미하는 것처럼 통용될 경우, 제작극장의 운영 방식에 대한 오해와 혼선을 줄 수 있다. ‘시즌제’는 단지 행정적 편성 단위인 반면, ‘레퍼토리’는 운영 시스템의 구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은 제작극장의 세 가지 상연 시스템—En-suite, Stagione, Repertoire—의 구조를 비교함으로써 제작극장 시스템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1. 연속 공연 시스템 (En-suite)

En-suite는 상업 극장 중심의 상연 방식으로, 하나의 작품을 일정 기간 매일 반복 상연하는 시스템이다. 흔히 ‘롱런(long-run)’이라는 개념으로 알려져 있으며, 미국의 브로드웨이나 영국의 웨스트엔드에서 가장 전형적으로 볼 수 있다. 이 방식은 높은 수익성과 마케팅 효율을 위해 상업적 성공이 입증된 작품을 장기 상연하며, 티켓 판매에 집중하는 구조다.

공연은 한 시기에 하나의 작품만 무대에 오르므로, 극장 가동률은 높지만 작품이 끝난 뒤에는 장비나 무대, 인력이 유휴 상태가 되기 쉽다. 인력은 대부분 외부에서 단기 계약으로 충원되며, 창작자와 배우, 기술 인력 모두 프로젝트 단위로 움직인다. 이로 인해 고용 안정성은 떨어지고, 예술가의 장기적 역량 축적에도 한계가 따른다. 무엇보다 예술적 다양성과 공공성 실현에는 구조적으로 취약하다.


2. 순차 공연 시스템 (Stagione)

Stagione는 이탈리아, 프랑스 등 유럽의 오페라하우스나 대형 공공극장에서 흔히 채택하는 방식으로, 한 시즌에 여러 작품을 일정한 순서로 무대에 올리는 구조다. 이 시스템은 일종의 큐레이션 방식에 가깝다. 각 작품은 전담 제작팀이 독립적으로 준비하고, 시즌 내 정해진 기간에만 상연된다. 그 기간이 지나면 다음 작품으로 교체된다.

이 방식은 일정한 집중도를 가지고 작품을 제작할 수 있어 예술적 완성도를 확보하는 데에 유리하다. 그러나 각 작품 사이에 무대 전환 시간이나 준비 기간이 필요한 경우, 극장의 활용도가 떨어질 수 있다. 인력 구조도 시즌 단위의 단기 계약이 중심이기 때문에 예술가의 지속적인 성장이나 고용 안정성 확보에는 제약이 있다. 관객은 사전에 공연 일정을 숙지해야 하며, 특정 시기에 원하는 작품이 상연되지 않을 경우 관람이 어렵다.


3. 상시 레퍼토리 시스템 (Repertoire)

Repertoire 시스템은 주로 독일어권 국가들(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의 국공립 극장에서 채택되는 구조로, 하나의 시즌에 여러 작품이 동시에 레퍼토리로 유지되며 교차적으로 반복 상연되는 방식이다. 이 시스템의 핵심은 다작 병행, 상시 보유, 교차 상연, 고정 인력, 그리고 예술적 순환 구조다.

‘레퍼토리’란 단순히 작품의 목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극장이 보유하고 있는 공연 콘텐츠가 상시 공연 가능하도록 유지되고 반복적으로 상연되는 상태를 말한다. 극장은 시즌 단위로 운영되긴 하나, 상연 방식 자체는 stagione처럼 순차적이지 않다. 오히려 매주 혹은 매일 다른 작품이 교차적으로 무대에 올라가며, 이로 인해 하나의 극장에서 수십 편의 공연이 병렬적으로 순환된다.


이러한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선 상주 예술가, 기술 인력 등 극장 고용 구조가 안정되어 있어야 하며, 공연 일정은 유연하고 복잡한 매트릭스 구조를 갖는다. 관객은 다양한 작품을 연중 언제든 선택해 관람할 수 있어 접근성이 높으며, 예술가 역시 다양한 역할을 병행하며 예술적 역량을 장기적으로 축적할 수 있다. 이 시스템은 고정 예산과 공공적 지원을 바탕으로 높은 예술성과 고용 안정성, 지역 공공성을 실현할 수 있는 구조다.

또한 이 방식은 공공요금제, 정기권, 교육 프로그램 연계 등과 접목해 예술교육, 관객 육성, 지역 문화 순환을 동시에 실현할 수 있다. 구조상 복잡하고 운영 난이도는 높지만, 중소도시 및 지역 공공극장과는 매우 높은 상호적합성을 갖는다

스크린샷 2025-07-31 23.43.24.png 제작극장 상연 방식 비교 - 직접 구성


현실의 유럽 공연계에서는 단일한 상연 시스템만을 고수하지 않는다. 특히 제작극장이 실제로 운영될 때에는 극장의 규모, 재정 자립도, 지역성, 예술 인프라의 성숙도에 따라 En-suite, Stagione, Repertoire 시스템이 혼용되거나, 각 방식의 장점을 취한 변형 모델이 활용되기도 한다. 예컨대 Stagione 기반의 운영 구조에 반복 상연을 병행하거나, 일정 기간 장기 공연된 작품을 이후 레퍼토리에 편입하는 방식 등이 그 예다. 이처럼 각 시스템 간의 구조적 차이는 단지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작품이 무대에 오르는 방식, 인력 운용의 지속성, 관객의 접근성과 관람 경험, 극장의 자원 활용 전략에 이르기까지 공연 예술 생태계 전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제작극장의 설계는 단일 모델의 도입이 아닌, 극장의 설립 목적과 지역 사회의 예술 수요, 인적·재정적 조건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유연하고 전략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결국, 오늘날 한국에서 통용되는 ‘레퍼토리 시즌제’라는 용어는 실제로는 작품을 시즌별로 순차 상연하는 Stagione 방식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레퍼토리’라는 개념이 지닌 지속성과 상시적 운영이라는 본래의 의미와는 거리가 있는 표현이다. 따라서 향후 제작극장을 설계하거나 관련 정책을 수립할 때에는 각 상연 방식 간의 구조적 차이를 보다 면밀히 이해하고, 이를 참고해 극장의 목표와 지역적 맥락에 부합하는 운영 모델을 유연하게 도입해야 할 것이다. 공연예술 생태계의 지속가능성과 공공성을 함께 고려할 때, 이들 상연 시스템은 단지 형식이 아니라, 극장의 철학과 방향성을 구체화하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되어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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