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장하준 런던대 교수는 “지금 한국 사회에 필요한 것은 단순히 더 빠른 성장이 아니라 어떤 성장이냐”라고 단 했다. 그는 “GDP 성장률 몇 퍼센트에 집착하는 것은 아직도 박정희식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며, 이제는 “국민을 더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방향, 즉 복지 확대와 삶의 질 개선, 그리고 혁신 성장을 위한 토대 마련”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이 문제의식은 단순한 경제 정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문화예술 정책 역시 ‘규모의 성장’이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공연 건수 확대, 국공립 단체의 양적 유지 같은 지표 중심의 접근은 더 이상 미래를 담보하지 못한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예술이 국민의 행복과 삶의 질을 어떻게 높이는지, 그리고 그것이 지역과 국가의 균형발전에 어떤 기여를 하는지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제작극장 시스템, 특히 독일식 레퍼토리 제작극장이 중요한 해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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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교수는 인터뷰에서 “옛날 가난할 때는 경제성장률 1~2%가 곧 생사의 문제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지금 필요한 것은 어떻게 국민을 더 행복하게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자살률, 최저 출산율, 압도적인 노인 빈곤율이라는 처참한 복지 지표를 기록하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정치권과 관료사회는 성장률 몇 퍼센트에 몰두하고 있다.
이는 문화예술 부문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얼마나 많은 공연이 열렸는가, 몇 명이 관객으로 들어왔는가”라는 양적 지표가 여전히 정책 평가의 핵심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문화예술의 본령을 구현할 수 없다. 장 교수가 말했듯, “성장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생산성 향상, 기술 투자, 과학 투자”를 이야기해야 하듯, 문화예술도 ‘얼마나 많이 보여주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깊이 있게 국민의 삶을 바꾸는가’로 전환되어야 한다.
장 교수는 또 “복지는 없는 돈을 만들어 쓰는 게 아니라, 왼쪽 주머니에 있는 돈을 오른쪽 주머니로 옮겨 쓰는 것”이라고 했다. 복지는 공동구매 메커니즘이기에, 100원을 내면 110~120원의 효과가 돌아온다. 문화예술 역시 이와 같다. 공연예술을 공공재로 지원하고, 지역 주민 모두가 접근할 수 있는 구조를 마련하는 것은 단순한 비용 지출이 아니라 삶의 질을 증진시키는 투자다.
독일은 이를 제도적으로 실현했다. 연방주의 체제 속에서 각 주정부가 문화 정책의 주권을 가지고 있으며, 그 핵심 장치가 바로 제작극장 시스템이다. 수도권 집중이 아닌 전국적 분산 구조로, 작은 도시에서도 수준 높은 오페라·연극·무용이 상시적으로 제작·상연된다. 이는 장 교수가 강조한 “국민 모두의 기본적 삶을 보장하는 보편적 기본서비스”의 문화예술 버전이라 할 수 있다. 즉, 문화민주주의의 제도적 구현이다.
지속 가능한 고용과 창작 기반
독일의 제작극장은 단순 공연장이 아니라 창작의 거점이다. 배우, 연출가, 오케스트라, 무용단이 극장 소속으로 안정적 고용을 보장받으며, 이는 창작력과 작품 수준으로 이어진다. 이는 장 교수가 말한 “혁신 성장을 가능케 하는 복지 안전망”의 예술적 버전이다.
지역 균형 발전의 중심
울름, 하노버, 프라이부르크 같은 지방 중소도시에도 극장이 존재하고, 이는 인구 유출 방지와 지역 정체성 강화에 기여한다. 장 교수가 “국민이 불행하다면 성장률 몇 퍼센트가 무슨 의미가 있냐”고 했듯, 지방이 소멸 위기로 내몰린 상황에서 제작극장은 단순한 문화시설을 넘어 균형발전의 촉진제가 된다.
문화민주주의와 공동체의 토대
독일식 제작극장은 특정 엘리트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시민이 접근할 수 있는 공공재다. 이는 장 교수가 지적한 “복지국가 확대 없이는 혁신 성장도 없다”는 논리와 직결된다. 예술 향유권이 고르게 보장될 때, 공동체는 더욱 창의적이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룰 수 있다.
한국은 지금 저출산, 고령화, 수도권 과밀과 지방 소멸이라는 구조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 장 교수는 “더 빨리 성장해야 한다는 고리타분한 담론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회 모델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화예술 부문에서도 마찬가지다. 콘서트 중심의 국공립 예술단체 시스템, 단발성 지원사업 중심의 예산 구조로는 더 이상 미래를 만들 수 없다.
필요한 것은 제작극장 시스템을 제도적으로 도입하는 것이다.
이는 국민의 문화적 기본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장치이며,
지역 소멸을 막고 균형 발전을 이끌 기반이며,
예술가를 단순 ‘철밥통’이 아니라 노동자적 정체성을 지닌 공공 창작자로 제도화하는 길이다.
장 교수는 인터뷰 말미에 “기술주도 성장, 혁신성장, 그리고 복지국가 확대라는 목표를 잘 정리해 새로운 경제사회 모델을 만드는 것이 이재명 정부의 책무”라고 했다. 문화예술정책 역시 이 연장선에서 봐야 한다. 단순한 양적 성장 지표가 아니라, 국민의 삶의 질, 지역 균형 발전, 문화민주주의라는 새로운 담론으로 전환해야 한다.
그 해답은 멀리 있지 않다. 독일의 연방주의와 제작극장 시스템은 이미 수십 년 동안 그 효과를 입증해왔다. 한국이 지금 선택해야 할 것은 얼마나 빨리 성장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행복하게 성장할 것인가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문화예술적 답이 바로 독일식 제작극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