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를 내린다. 에티오피아 블랜드, 중배전이다. 베리로 시작해서 다크 초콜릿으로 끝난다. 그렇게 적혀 있다. 물은 평창수. 드립포트에 물을 붓는다. 온도는 95도. 밀폐 용기를 열어본다. 냄새를 맡는다. 원두를 계량한다. 20g. 그라인더에 원두를 넣는다. 알갱이들이 한 곳으로 떨어진다. 원두가 그라인더에 조용하게 있다. 손으로 그라인더를 돌린다. 돈이 없어 핸드밀 그라인더를 샀지만 나는 이것이 좋다. 육체가 움직이는 느낌이 생생하기 때문이다. 손을 돌리면 원두가 갈린다. 분명한 형태가 있던 원두는 갈려서 가루가 된다. 원두는 부서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무력하다. 손을 돌리면 처음에는 전환근에 힘이 들어가고 돌아가는 속도가 불규칙적이다. 그러나 행위가 지속될수록 규칙을 갖고 편안하다. 서버와 드리퍼를 결합한다. 그 위에 여과지를 올려 놓는다. 드립포트에 담긴 뜨거운 물로 여과지를 적신다. 여과지는 드리퍼와 붙어서 꼼짝하지 않는다. 서버에 담긴 물은 서버 용기를 데워 차분하게 만든다. 이제 서버에 담긴 물을 버린다. 분쇄된 원두를 꺼낸다. 냄새를 맡는다. 원두를 여과지 위에 털어놓는다. 타이머를 재고 영점을 맞춘다. 뜸들이기를 시작한다. 포트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물은 가운데부터 시작해 가장자리로 간다. 물줄기는 일정해야 좋다. 나는 시각장애인이기 때문에 균일하게 추출하기 어렵다. 무게와 시간과 물줄기를 동시에 컨트롤 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익숙해지면 문자 그대로 눈감고도 할 수 있는 것이 되기를 바란다. 뜸들이기가 끝나면 잠시 공백이 생긴다. 공백 속에서 분쇄된 원두를 둘러싼 물이 떨어진다. 커피라고 불리는 그것이 서버에 담기고 있다. 1차 추출을 한다. 공백이 생긴다. 나는 커피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2차 추출을 한다. 공백이 생긴다. 나는 커피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이제 드리퍼를 분리한다. 서버에 나머지 물을 붓는다. 나는 가수(加水)를 하여 내리는 방식을 좋아하는데 그것이 쉽고 깨끗한 맛이 나오기 때문이다. 단맛이 베이스로 그 위에 산미가 살짝 피어나는 것이 바람직하다. 서버에 완성된 커피 냄새를 맡는다. 그것을 머그에 옮겨준다. 나는 머그를 들고 자리로 돌아간다. 뜨거운 커피는 제대로 맛이 나지 않는다. 뜨거운 향이 난다. 좋은 커피는 식을수록 맛있다. 그래서 요즘은 뜨거운 것에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식어도 맛있는 것, 식어야 맛있는 것이 진실하다. 스피커를 틀고 턴테이블을 재생한다. 엘피를 고른다. 재즈를 고르려다 말고 빛과 소금 1집을 고른다. 나는 빛과 소금을 좋아한다. 나는 슬픈 인형을 좋아한다. 방 안에는 커피향으로 가득하고 턴테이블에는 엘피가 돌아가고 있다. 머그에는 온기가 느껴지고 몸은 나른하다. 노래를 듣고 커피를 마시는 것이 나와 잘 맞는다. 내가 원하는 순간이다. 욕망이 단순해질수록 삶은 선명해진다. 어쩌면 내 삶에 커피와 음악,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몸 안에 커피가 들어온다. 몸 안에 음악이 들어온다. 소리는 귀에 거슬리지 않고 그러나 맴돌고 있다. 식도로 넘어간 커피는 적절한 온도로 몸 안에서 움직인다. 차갑거나 뜨거운 순간이 평상심을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