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대신 세상이 적어준
시간이 지나 잉크가 다 날아가버린, 이제는 환불도 교환도 불가능한 얇은 종이 뭉치들.
책상 한구석에 쌓인 채, 쓰레기통으로 떨어질 순서만 기다리는 그것들이 유독 바스락거리는 날이 있다.
폐기 처분을 앞둔 주제에 너는 끈질기게 내게 말을 건다.
내가 그날 4,500원짜리 아메리카노 한 잔으로 몇 시간을 버텼는지,
누구와 마주 앉아 밥을 먹으며 겉도는 대화를 나눴는지,
어떤 허기를 채우기 위해 늦은 밤 편의점을 서성였는지.
흐릿해진 숫자 사이로 그날의 계절과 기분이 떠오른다.
그건 내가 카드를 긁을 때마다 세상이 대신 적어준,
나의 비루하고도 소중한 일기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