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 게임>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는 일.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고, 형사를 위한 섬도 없었다.

by 김여호

<오징어게임> 속 황준호 형사(배우 위하준)를 두고 유난히 많은 말들이 오갔다.

“왜 등장했느냐”, “꼭 필요한 인물이었나”, “나와서 한 게 대체 뭐냐”, “이야기 속에서 그의 역할은 무엇이었는가”—따위의 질문들로 그의 등장을 의문시하며, 무력한 방관자라는 비판을 주저 없이 내놓는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 역시 그런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다. 무기력한 추적, 허탕뿐인 수사, 결정적인 순간마다 도달하지 못하는 그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여러 차례 맥을 빠지게 하거나 사건의 본류로부터 이탈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했다. 그의 행보는 끝없이 허공을 맴돌았고, 결국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 채 사라졌다.


그런데 문득, 그의 존재가 오히려 이야기의 균형을 이루는 불편한 축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의 오래된 반골 기질 때문일까, 혹은 그 무력감이 내 안의 어떤 오래된 무기력과 맞닿아 있었던 것일까.

황 형사는 어쩌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존재한 인물이 아니라, 해결되지 않는 현실을 끝내 끌어안는 인물로서 제 기능을 한 것은 아닐까.




그는 끝까지 추적하고, 도망치고, 감시하고, 숨어든다.

하지만 그가 남긴 것은 구조나 정의가 아닌, 실패의 기록이다.


그는 모든 상황을 알고 있었지만, 누구도 구하지 못했다. 그가 쫓던 진실은 끝내 손에 닿지 않으며, 그가 품었던 정의는 어딘가에서 미끄러져 내린다.


감독은 어쩌면, 이 허무하고도 쓸쓸한 형사를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정의는 체제 안에서 실현되지 않으며, 법은 구조 속에서 방향을 잃는다는 것을.


무력한 정의감, 외면당하는 진실, 그리고 미해결로 남겨진 구조적 폭력의 잔해들. 그는 그것들을 모두 목격한 채 쓸쓸히 퇴장하는 인물이다.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기에, 오히려 더 많은 걸 말하고 떠나는 존재.



코엔 형제의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속 무기력한 보안관도 비슷한 양상을 띄고 있다.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위치에 선 자, 그로 인해 현실의 진실한 무게를 온몸으로 감내해야 하는 자.


악의 구조는 바뀌지 않고, 폭력은 우리를 비웃듯 반복된다. 그 속에서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감시하고, 기록하고, 증언하는 일. 그리고 그마저도 끝내 좌절될지라도, 그 무력함을 끝까지 견디는 일.


황준호 형사는 실패한다.

하지만 그 실패가 곧 진실을 말한다.

그는 체제에 구멍을 뚫지도, 악을 심판하지도 못했지만,

끝까지 진실을 향해 움직였고, 끝내 무너지는 과정을 통해 정의란 무엇인가를 되묻게 했다.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정의를 실현한 자가 아니라, 끝내 정의에 닿지 못한 자의 자리에 우리는 설 수 있는가.

성공한 정의의 얼굴이 아니라, 실패한 정의의 뒷모습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우는가.


황형사는 그 답을 직접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의 존재 전체가, 우리에게 질문 하나를 남긴다.

“정의는 과연 어디에 있었는가”라며 말이다.


사진 출처: iMBC 연예뉴스 (https://enews.imbc.com/News/RetrieveNewsInfo/3265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