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를 떠올리면 20년간 가장 먼저 머릿속을 맴돌던 요양병원, 장례식장의 장면들을 정리하고 나니, 이제야 할머니와 살던 보통의 일상이 어땠었나 떠올리게 되네. 할머니와의 일상은 우리가 같이 지냈던 방에 머물러 있었던 것 같아.
할머니와 방에 누워 TV를 보는 게 일상이었어.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가요무대예요. 옛 노래 가사들이 아주 졸리기도 했지만 할머니가 노래를 따라 목소리를 소리 내는 게 신기해 늘 그 옆에 누워있었지. 세상 어떤 노래보다 삶의 이야기를 담은 노래들이 가득했던 것 같아. 자신을 드러내길 싫어하고, 즐거운 자리에선 없는 사람인 듯 알아서 빠져버리던 할머니가 그렇게 목소리를 내어 노래를 부르는 게 참 신기했지. 할머니의 이야기도 아닌데, 노래 가사들은 할머니의 마음속을 보여주는 것 같았어.
할머니는 동네 친구분들이 별로 없었잖아. 여느 할머니들이 흔하게 다니던 종교기관에도 가지 않고, 촛불에 냉수만 떠놓고 가족들의 무병장수를 빌만큼 독자적인 종교생활을 하셨지. 그런데 일명 약장수들의 말은 왜 그렇게 철석같이 믿었는지 몰라. 할머니도 친구들을 따라가고 싶었던 걸까? 동네에 찾아오는 장사꾼의 이야기를 들으러 매일같이 출석했어. 약장수를 따라갔다가 ‘당신 같은 사람이 왜 왔냐’ 내쫓겼다면서도, 물건을 살 수 있다고 비 짚고 들어가 당당히 받아 온 증정품들은 하나같이 어딘가 이상한 물건들이었지. 증정품을 전리품처럼 꺼내놓곤 하던 할머니가 유일하게 사온 '노란 가루'는 만병통치약이라고 했었어. 그 당당한 태도에 시큼하고 노란 가루를 사양하기 아주 어려웠던 게 기억나요.
부모님의 빈자리에도 사춘기를 잘 보내고 그 나이 때 소녀들처럼 살 수 있었던 것은 만병통치약처럼 부모님의 빈자리를 채워 준 할머니가 있었기 때문인 거야. 무한히 내 편이 되어주는 할머니가 있어서 무슨 일이 있어도 다 괜찮았지. 돌아보면 할머니와 내가 서로를 돌보고 의지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방 밖을 나서면 주변 사람들에게 줄곧 흔들리던 우리가 서로 쓰러지지 않게 붙잡아가면서 살았던 거지.
그래서 더더욱 할머니를 모른 척했던 순간이 각인되어 있어요. 그때 왜 할머니를 외면했을까? 보이지 않는 낙인을 찍은 것 같아 죄스러워 자꾸 곱씹게 되는 장면이지.
할머니가 학교 앞으로 찾아온 날, 사실 멀리서부터 할머니를 알아보고 날 찾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어. 하지만 친구들에게 동그랗게 둘러싸여 굽은 등으로 날 찾고 있는 할머니에게 다가가지 못했어요. 두렵다는 걸 생각할 틈도 없이 먼저 몸이 움직이지 않았지. 할머니의 굽은 등을 보여주는 것이, 할머니가 찾아와야만 했던 부모님의 빈자리를 들키는 것이, 나의 빈 틈을 들키는 것 같아 아주 싫었어. 우리 둘이 있던 방은 안전했지만, 할머니가 방을 벗어나 동네로, 나의 학교로 들어오는 것은 달랐던 거지. 끝내 할머니를 모른 척하고 도망갔어요. 할머니를 모른 척한 게 미안해서 학교에 왜 찾아왔었는지 묻지도 못했어요. 이전에는 할머니의 굽은 등이 '무엇'인지 생각하며 살지 않았었는데 그 일이 닥쳐온 이후로 할머니의 굽은 등이 '숨겨야 하는 무엇‘이 되어버렸어요.
카프카의 '변신'이라는 소설이 있어요. 그레고르 잠자라는 사람이 자고 일어나 보니 벌레가 되는 충격적인 소설이에요. 사람들이 그 소설을 읽으면 사람이 벌레가 된다는 사실에 끔찍해하지만 자신에게도 그런 순간이 닥쳐올 수 있다고 상상할까? 벌레가 되어서 스스로 자신의 삶을 얼마나 갉아먹고 있었는지, 가족 안에서 어떤 존재였는지 알게 되는 이 소설이 끔찍하리만큼 현실과 너무나 닮아있는 데 말이지.
그레고르 잠자처럼 그날 이후로 나와 할머니의 삶도 하루아침에 변신해 버린 것 같아. 우리의 따뜻했던 방은 머리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는 작고 어두운 방으로 여겨지고, 넓었던 할머니의 굽은 등은 '장애'로 인식 되었어. 사춘기가 되면서부터는 할머니와 머물던 방에 친구들을 데려오지 않았어요. 친구들이 앉지 못하고 서성이며 당황스러워했던 걸 본 이후로 그랬지. ‘변신’이라는 소설 속의 가족들은 벌레가 된 그레고르 잠자와의 대화를 잊어버리고 그를 숨기기에 바빠져요. 그의 소중한 물건들도 허락 없이 버리기 시작하지. 집에 왔던 손님들도 벌레로만 여겨지는 그레고르 잠자를 보고 소리를 지르며 달아나. 그 집은 그레고르 잠자가 평생을 일구어 온 땅인데 말이야.
되돌아보면 우리는 할머니가 평생 일구어 온 가정 안에서 태어나 자랐어요. 함께 살던 방은 화투 하나로 그날의 날씨도 맞추고 기억력 놀이도 할 수 있는 재밌고 따뜻한 공간이었어요. 한때는 할머니를 외면한 나를 미워하고 그 장면을 곱씹었어요. 하지만 이제는 미안하다는 말 대신 다시 할머니를 외면했던 그날로 돌아가 큰 소리로 할머니를 부르고 달려가 날 데리러 왔냐고 물어보고 싶어요. 그리고 할머니와 보냈던 따뜻한 일상을 더 기억해보려고 해요. 추석이면 같이 나물도 무치고, 사춘기에 괴로워하다가도 할머니가 사준 초코바에 기분 좋아져 즐거웠던 날들도 많았다는 사실을 인정해 보려고요. 따뜻한 방에서 함께 누워 세상을 노래하던 할머니를 조용히 응원하던 나도 기억해 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