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사 이벤트에 당첨되어 목화솜 꽃다발이 집으로 배송된다는 내용이었다. 그가 심심풀이로 이벤트에 응모하면서 수령인을 나로 한 모양이었다.
사 년 간 남자친구였고 이십 년 동안 남편이었던 그에게 새삼 고마워한다.
그가 떠난 후 오십 여일이 지났지만 그동안 집과 자동차 문제로 한두 번 통화한 것이 다일뿐 카톡 한마디 주고받은 게 없는데, 럭키찬스 이벤트에 당첨된 꽃다발이라니 무척 그 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에는 무료 상영 영화를 보러 갔다.
개봉한 지 몇 년 지난 뮤지컬 음악 영화 라라랜드였다. 여주인공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직장을 얻었다가 되려 비난을 받고 ‘네가 바랐던 게 이거 아니었냐’며 화를 내는 남자 주인공의 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멍해졌다.
영화의 흐름을 놓쳐버린 나는 어두운 영화관에 앉아서 혼자 생각에 잠긴다.
마르고 철없는 소년 같았던 그가 배 나온 중년이 되어가는 동안, 여자친구였고 아내였던 나를 위해서 무척 애썼을 것이다. 그가 대학원을 졸업하고 직장을 얻어서 매일 출근을 하고 주말에도 학원에 다니며 공부를 해서 자격증을 땄던 모습을 회상해본다.
스크린에서는 남녀 주인공들이 헤어진 5년 후에 다시 만나서 서로를 슬프게 쳐다본다. 만약 그때 헤어지지 않았더라면, 결혼해서 아이도 낳고 한 집에서 살았더라면 상상하면서.
나 또한 사 년간 남자친구였고 이십 년 동안 남편이었던 그 남자를 떠올려본다. 한때는 젊고 건강했던 그와 나는 하얀 예복을 차려 입고 가족과 지인들의 축복 속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아담한 신혼집에 살다가 아파트와 자동차를 샀고 저축을 하면서 이십 년을 한 집에서 살았다.
마음이 힘들 때마다 나는 밖에 나가서 걸었고 그는 음식을 만들거나 소파에 누워서 티브이를 보았다.
결혼한 직후부터 나는 함께 강변을 걸어주지 않는 그를 원망했다. 아마 그도 집안에서 혼자 요리를 해 먹으면서 집 밖으로 나가 걸어다니려고만 하는 나를 미워했을지 모르겠다. 서로 그토록 다른데도 그 오랜 세월 동안 함께 했다니 그러고 보면 우리는 정말로 깊이 사랑했던 모양이다.
마르고 호리호리한 미소년 같던 그가 주말마다 나를 만나서 데이트를 해줘서 무척이나 기뻤다. 여름날 영종도의 모래밭에 나란히 누워있던 어느 날 절대로 나를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해줘서 행복했다. 나와 결혼해서 남편이 되어 주었던 것에 대해, 함께 제주도로 내려와 준 것에 대해 고마워했다. 그리고 이제는 제주도에 계속 머물고 싶어 하는 나를 떠나면서 이혼해준 것에 대해 감사한다.
그와 잘 헤어져서 다행이다.
가끔은 그가 제주도에 있는 나를 찾아와 주길 바라지만 부질없는 생각임을 안다.
그는 여행을 싫어하고 밖에 나가서 돌아다니는 건 딱 질색인데, 다정한 연인이었을 때도 내켜하지 않았던 일을 지금에 와서 해줄 리는 없으니까. 가끔씩 그를 보고 싶지만, 나 또한 굳이 비행기를 타고 수도권 아파트로 가지는 않을 테니까.
내가 사랑했던 남자가 한때는 내 연인이었고 남편이 되어 주었던 게 마치 꿈만 같다.
그에게 고맙고, 행복한 가장이 아니라 중년의 이혼남으로 살게 만들어서 미안했다. 앞으로 그가 잘 살았으면 좋겠다.
날이 저물고 혼자서 가을바람을 맞으며 클래식 공연을 보러 가는 나처럼, 멀리 떨어져 있는 그도 소파에 편안하게 누워서 좋아하는 드라마나 영화를 감상하고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