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어두워지면 해안가 산책로를 따라 멋들어진 조명등이 불을 밝히고, 수평선에는 어선의 불빛들이 별처럼 빛나는 곳이다.
언젠가 그곳에서 혼자 캠핑을 해보고 싶었다.
주황색 일인용 백패킹 텐트를 치고 캠핑 랜턴으로 환하게 불을 켜놓고, 테이블과 의자를 펼쳐서 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보며 책을 읽으면 멋질 것 같았다. 근처에 편의점도 있고 산책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위험하거나 무섭지도 않아 보였다. 정 불편하면 가까이 세워둔 내 차를 타고 집에 가면 그만이었다.
지인 하나가 내 얘기를 듣더니, 뭐 어려울 거 있냐며 일요일에 당장 텐트를 치자고 말했다.
일요일 오후의 하늘은 쾌청하고 바람은 드물게도 고요했다.
햇살이 푸르른 수면에 떨어져서 반짝반짝 빛나는 바다는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범섬 앞 해안가 자갈밭이 썰물에 넓게 드러났다. 허리께까지 잠길 각오를 한다면 섬까지 걸어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잔디밭에는 피크닉을 나온 사람들이 그늘막과 의자를 펼쳐놓고 한가롭게 오후의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먼저 도착한 지인이 쉘터를 펼치고 있었다. 캠핑용 테이블과 의자를 세팅하고 식기와 컵을 꺼내 쓰기 편리하도록 정리해놓고, 밤에 추울 때 덮을 담요까지 한쪽에 가지런히 쌓아놓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어스름이 깔릴 무렵에 지인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두 손에 모둠회, 피자, 밤에 데워먹을 해장국 등등 포장음식을 잔뜩 들고서.
5리터짜리 캠핑용 워터 저그에 차가운 맥주 세 병과 한라산 소주 한 병이 들어간 폭탄주가 제조되었다.
광어와 우럭, 참돔이 골고루 들어간 모둠회는 반투명한 생선살이 오독거렸고, 도우가 뜨거운 피자는 풍성한 치즈가 쫄깃하고 폭신했다. 나도 들고 있던 파워에이드 뚜껑을 따서 건배를 했다.
혼자서 바닷바람을 쐬면서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쉘터 안에서 제주에서 친해진 지인들과 편하게 수다를 떨면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는 않았다. 처음에 생각했던 캠핑은 아니었지만.
사십이 넘은 서귀포 독신자들은 알고 보니 대부분 이혼 선배였다.
왜 헤어졌냐는 내 질문에 몇 년이나 지난 일이라 생각도 잘 안 난다고들 했다. 그러면서 '내가 잘못했지 뭐' 하면서 웃기만 했다.
음료수만 홀짝거리는 나에게 누군가 왜 한사코 술을 안 마시냐고 물었다.
- 술 마시고 사고 쳐서 결혼까지 했거든. 그 후로 가끔 혼자서 와인만 마셔.
나도 실없이 웃었다. 제주에서 만난 이들과 캠핑 의자에 둘러앉아 밤바다를 보고 있자니 과거의 일들이 다 꿈만 같았다.
화장실에 갔던 지인 한 명이 오는 길에 편의점에서 와인 한 병을 사 들고 왔다.
나는 술이 약한 데다가 술김에 후회할 행동이나 말을 할까 봐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는 거의 술을 마시지 않았지만 이런 날은 한두 잔 해도 될 것 같았다. 지인이 종이컵에 따라준 와인에서 알싸한 포도주 향이 올라왔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핏빛 와인은 시큼하지도 떫지도 않은 게, 상처 난 곳을 다독여주듯이 상냥하고 부드럽게 넘어갔다.
밤하늘 가운데서 유난히 밝은 별 하나가 다이아몬드처럼 빛났다. 한참 바라보고 있자니 몇 개의 별들이 더 보였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더 많은 별들이 보였다.
어느새 피크닉을 나왔던 사람들은 흩어지고 잔디밭에는 우리 일행들 뿐이었다.
사방이 너무나 고요해서 파도 소리가 한층 더 또렷하게 들렸다. 밤바다에는 범섬의 거무스름한 윤곽이 보일 듯 말 듯 하고 수평선에 일렬로 늘어선 어선의 불빛들이 별처럼 아련하게 빛났다.
술을 마시면 역시 쓸데없는 얘기를 하고 싶어 진다.
술 마시고 다들 취해서 잊어버려줬으면 하는 얘기를. 그래서 여태 술자리에 있어도 음료수만 마시던 나를 다들 타박했었나 보다.
- 내가 남자 얼굴을 진짜 많이 보거든.
뜬금없이 꺼낸 내 말에 다행히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 전남편이 사실은 딱 내 타입이었어. 집 나가는데 보니까 아나운서 OOO 닮았더라.
- 헐... 그러냐. 근데 처음 봤을 때보다 너 표정 많이 좋아졌다.
- 나랑 이십 년을 살다가 여기까지 와줬는데, 진짜로 나 많이 사랑했었나 봐.
- 다 왔다 가는 거지.
- 근데 나 그 사람 무서워서 말 한마디 못 붙이고 살았다. 사랑이 뭐냐. 그런 게 있기나 한 거냐.
나는 자꾸 이상한 소리를 늘어놓는다.
술을 마셔도 재미없는 나를 놔두고 지인들은 각자 연애하다 깨진 얘기며 전 애인에 대해서 수다를 떨었다.
연애 경험이 많은 지인이 가장 신이 났다. 키스를 하는 데까지 왔으면 다 된 건데 초짜들은 거기서 서두르다가 망한다고.
- 결벽증 있는 사람은 키스가 안 되잖아. 그래서 내가 전남편이랑 그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가 없었다고.
뜬금없는 내 말을 들은 지인이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자꾸만 헛웃음이 나왔다. 반쯤은 진짜로 웃긴 것 같기도 했다.
- 또 좋은 일 생길 거야.
내 등을 두드리는 그에게 그걸 위로라고 하냐고 쏘아붙이려다가 반쯤 남은 와인을 쭉 마셨다. 한 명이 일어나서 와인을 또 한 병 사 왔다. 새로 딴 와인을 누군가가 내 잔에 부어주었다. 엄지손가락을 와인 병 바닥에 받치고 부드럽게 손목을 움직여서 병을 뉘었다가 드는 그 모습을취한 채로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그와 마주 앉아서 와인 한 잔 마셔본 지가 언제였던가. 한때는 언제나 그와 함께 있고 싶어서, 마주 보며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모든 걸 같이 하고 싶어서 결혼까지 했는데.
이렇게 날씨 좋은 날 밤바다 앞에 나와서 와인 한 잔도 안 마셔주고 가버렸네.
만약에 여기 그가 있었으면 나는 또 그를 원망하며 잔소리를 해댔겠지. 그가 나와 밥을 먹지 않고 잠을 자지 않고 와인을 마시지 않은 건 다 내 탓이었다. 모든 게 다 내가 나빴다.
새로 사 온 와인도 다 떨어갈 무렵에는 자정이 넘어가고 편의점도 문을 닫았다. 지인 중 두 명은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나머지 세 명은 각자 자기 텐트에서 잘 예정이었다.
흐트러진 테이블을 대충 정리하고 가져온 의자 두 개를 접어서 텐트로 나르는데 취기가 한꺼번에 올라왔다.
반쯤 쓰러지듯이 텐트 입구의 지퍼를 닫은 후 그대로 거위털 동계 침낭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바람이 점차 강해지기 시작해서 백패킹 텐트가 크게 들썩거렸다.
두툼한 침낭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눈을 꼭 감았다.
바람 소리에 파묻혀서 파도 소리가 들릴 듯했다.
새우처럼 웅크린 손발은 남의 것처럼 차갑고 침낭 속도 춥기만 한데, 유일하게 더운 내 날숨에서 시큼한 와인 냄새가 났다.
'이게 다 꿈인가 봐.'
바람에 들썩이는 주황색 백패킹 텐트 안에서 흐릿한 잠 속으로 빠져 들면서 어렴풋이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