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는 내가 제주에 내려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만난 친구였다. 나보다 두 살 아래였고 줄곧 독신으로 살았다.
고향은 육지의 중소도시였는데 10여년 전 제주에서 만난 친구들이 너무 좋아서 자신도 정착했다고 말했다.
칼바람이 불던 1월에 오르막길에서 비틀대던 나에게 듬직한 어깨를 빌려주던 그녀.
학창 시절 테니스 선수답게 탄탄한 근육질 몸매에 개나리색 등산복이 잘 어울렸다. 산에서 멧돼지로 오인받아 총 맞지 않으려면 밝은 색을 입어야 한다던 H는 유머 감각도무척 뛰어난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갑자기 추워진 날, 오름에서 덜덜 떨면서 내려와서 집으로 가는 길에 그녀의 부고를 들었다.
소식을 알려준 지인은 연신 믿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 심정은 내가 더했다. 바로 얼마 전에도 그녀와 함께 캠핑을 했는데. 선선한 가을바람을 쐬며 캠핑의자에 마주 앉아 수다를 떨었는데. 밤하늘의 별이 너무 많다며 텐트에 들어가길 아쉬워했는데. 동계 침낭이 없는 나에게 추울 테니 입고 자라며 다정하게 경량 패딩 상하의를 꺼내 주었는데.
그날 저녁, 캠핑장 데크에서 그녀는 불을 피우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칼국수를 만들어주었다.육수는 오조리에서 직접 캐온 조개로 만들었다고 했다. 칼국수 면이 익는 동안에 조선간장에 참기름과 청양고추로 양념을 즉석에서 만들어서 조금씩 올려서 먹으라고 하던 그녀.
물감 팔레트처럼 갖가지 양념통이 가지런한 그녀의 파우치와 마술처럼 요리를 뚝딱 만들어내던 잰 손놀림이 눈에 선하다.
H는 제주 중산간 마을에 위치한 작은 타운하우스에서 살았다. 잔디 마당과 돌담이 있고 거실과 방 하나, 화장실이 있는 작은 단층집이었다.
나는 그녀의 순박한 미소와 숨김없이 솔직한 성격이 부러웠고, 전문직으로 일하던 스펙에 미련 갖지 않고 제주도에 정착해서 작은 식당을 운영하던 결단력이 부러웠다. 하고 싶은 일 하고 살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사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그런 H에게서 뜻밖의 얘기를 들은 것은 캠핑을 가서 함께 별을 바라보던 밤이었다. 그녀는 삼 년 전 뇌출혈로 쓰러졌었고 뇌혈관이 소실되는 병이 진행 중이라고 했다. 운나쁘게 반신불수가 될까 봐, 요양원 신세가 될까 봐 두렵다고, 병이 더 악화되면 존엄사를 위해 스위스로 가서 한 달쯤 스위스의 풍경을 실컷 본 후에 죽고 싶다고 했다. 나는 반쯤 비꼬듯이 물었다. 뭐 번거롭게 스위스까지 가냐고, 여기 제주도에도 좋은 곳 많고 간편하게 끝낼 수 있는 방법 많지 않으냐고.
그녀는 조금 쓸쓸하게 웃더니 가족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서 그런다고 말했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다면 늙은 아버지와 치매를 앓는 어머니, 그리고 남동생 부부가 상처받지 않겠느냐고. 존엄사가 피치 못할 사정이고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가족과 지인들에게이해를 구한 후에 홀가분하게 떠나고 싶다고.
스위스 존엄사를 위해서는 보호자가 필요한데 절친 하나가 그 역할을 해주기로 했다는 H에게 '그런 친구 있으니 넌 성공한 인생'이라며 나는 또 못돼먹게 말했다. '지금은 해주겠다 했는데, 그때 가봐야 알지 뭐.' 하며 그녀는 또 웃었다. 나도 불치병이 있으니 스위스는 같이 가자고 했더니 그녀는 둥그렇게 눈을 뜨고 '무슨 불치병?'하고 되물었다. 그냥 '정신적인 거. 근데 들으면 누구나 인정할만한 거야.'라고만 말했다. 나는 그녀처럼 소탈하지도 솔직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언제 자세히 말해줘.'라던 H는 보름 후, 직장에서 심정지로 혼수상태에 빠졌다. 구급차에 실려서 병원으로 가던 중에 잠깐 의식이 돌아와서 구급대원들이 가족과 지인에게 연락을 했다고 했다. 부모님과 남동생 부부가 급히 제주로 내려오고 마음의 준비를 할 때까지 혼수상태로 며칠을 더 버티던 그녀는 평화롭게 떠났다. 평소에 바랬던 대로 고통 없이 편안한 상태로. 극단적인 선택으로 가족들에게 죄책감을 안겨주지도 않은 채.
떠나기 두 달 전에 H는 집 근처의 널따란 숲길에 길 찾기용 리본 달기를 완성했다. 갈림길이 여러 개로 나 있는 숲길에 들어가면 인터넷이 거의 안 터지고 안내 표지판도 없어서 길을 헤매기 쉬운 곳이었는데, 갈림길에는 무지갯빛 리본을 달았고 자신이 즐겨 산책하던 산책로 나무들에는 드문드문 주홍빛 리본을 묶어놓았다. 표식을 따라가기만 하면 길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그 숲길에는 지금도 그녀가 매달아 놓은 리본 표식이 바람에 나부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