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엔 너희 집에서 잘까?

서귀포에서 한 잔 어때요

by 유랑

11월의 밤은 일찍 찾아온다. 다섯 시 반부터 해가 지고 여섯 시면 이미 어둡다. 골프 연습장에서 돌아와서 씻고 난 일곱 시. 적막한 집 안에 전화벨이 울렸다.

- 혼자 있기 힘들면 지금 갈까?

희 집에서 자고 내일 트래킹 같이 나가면 되니까.

- 아..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내일 봬요, 언니.



이 날은 친구 H가 제주도에서 3일장을 마치고 육지의 추모공원으로 떠나는 발인 날이었다. 루이 언니는 아침에 발인에 참석했었고 나는 가지 않았다.

우울증이 있는 나는 생전의 H와 스위스 안락사에 대해 대화를 나누곤 했었는데 그걸 아는 루이 언니가 나를 걱정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는 그 배려가 장히 생경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런 배려를 받아본 적이 거의 없었으니까. 를 동정하는 건가, 낯설기도 했었다.


하지만 전화를 끊고 보니 루이 언니와 한 잔 하면서 H가 떠난 밤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이 언니는 우아한 외모와는 달리 술이 엄청나게 센 주가였다. 이전에 캠핑을 두 번이나 한 적이 있었는데, 둘 다 텐트 안이나 침낭도 가리지 않으니까, 나와 한 침대를 쓰기 불편하면 거실에 소파베드도 있고 에어매트와 침낭도 있었다. 어렵게 생각할 게 없었다.


- 언니, 서귀포에서 한 잔 할래요? 밤바다 보면서.

여긴 새벽까지 하는데 많아요. 저희 집에서 자고 내일 트래킹 같이 나가요.

- 그럴까?

다시 전화를 걸어서 묻자, 웃음기 띤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이 언니는 한 시간 후에 도착했다. 나는 안주가 맛있고 얼큰히 취하기 좋은 요리주점과 맥주나 와인 한 잔 가볍게 할 만한 해변 카페 중에 어디가 낫겠냐고 물었다.

루이 언니는 해변가 카페를 골랐다. 자고갈까 했는데 생각해보니 준비할 게 많아서 밤에 귀가하기로 마음을 바꾼 것이었다.

'리틀 보라카이' 카페에는 손님이 하나도 없었고 아쉽게도 밤바다는 보이지 않았다. 만 한쪽 벽면 전체를 스크린으로 이용해서 햇살이 눈부신 보라카이 해변 풍경 넘실거리고, 파도 소리가 음악에 섞여서 들렸다. 바 테이블에 걸린 유리잔이 조명등에 반짝거렸고 종업원도 친절했다. 그만하면 괜찮은 분위기였다.

딱새우 명란 파스타에 스테이크 샐러드.

루이 언니가 주문한 수제 맥주와 내가 고른 하우스 와인이 정갈하게 나왔다.


루이 언니는 보라카이에 가봤고 나는 세부에 간 적이 있었는데 제주도가 더 낫다며 가벼운 수다를 떨었다.

하루 종일 거의 아무것도 못 먹었다는 루이 언니는 여전히 안주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고 맥주만 몇 모금 마신 뒤에 조용히 입을 열었다.


- 내가 H랑 친했던 거 모르지?


나는 몰랐었다. 루이 언니에게는 남편과 아이들이 있었고 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H는 독신이었다. 둘 다 인기 있고 친구가 많았지만 루이 언니의 친구들은 남편과 자녀가 있었고 H에게는 독신인 친구들이 많은 걸로 알았다.


- H는 내가 제주에 정 붙이게 해 준 친구였어.

집으로 여러 번 놀러 가서 같이 요리해 먹고 며칠씩 자고 가기도 할 만큼 친했어.


손에 쥔 유리잔만 바라보고 있는 루이 언니는 무척 쓸쓸해 보였다. 겉보기에 우아한 사모님처럼 보이지만 방랑자의 영혼을 가졌다던 그녀. 그리고 털털한 분위기와 달리 섬세하고 예민한 영혼의 소유자였던 H는 서로 깊은 우정을 나누던 사이었나 보다.


H의 부음을 듣고 바로 빈소로 찾아갔던 루이 언니는 '잘 보내주고 왔어'라고 담담하게 말했었다. 챙겨야 할 남편에 아이들이 셋이나 있었으므로 가족들에게 돌아간 줄 알았는데 발인까지 다녀와서 하루를 혼자 보냈다는 거였다.


조문을 갔다가 시끄럽게 울고 온 나는 우울증이 있다며 발인에도 안 갔는데, 그런 내가 걱정돼서 서귀포까지 달려온 언니게 마냥 부끄러웠지만 부끄럽다고 말하지 않아도 이해해줄 것만 같았다. 그 마음을 붙들고 잠깐 의지하고 싶었다. 부끄럽게도.


- 여기서 색달 해변까지 도보로 30분쯤 걸리는데.. 나가서 좀 걸을래요?


열 시 반에 카페가 문을 닫을 무렵 내가 제안했다. 트래킹 모임에서 만난 우리에게 왕복 한 시간여 밤 산책은 가벼운 운동이었고 맥주 한 잔의 취기를 날려 버리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바다로 향하는 너른 아스팔트 중앙분리대를 따라서 키 큰 야자수가 커다란 이파리를 너울거렸다. 바람이 드물게 잔잔한 날이었다. 가로등 불빛만 환할 뿐 차들도 인적도 거의 없었다. 사방이 무척 고요했다.

우리는 완만한 내리막길을 걷고 또 걸었다. 그러다가 색달 해변에 가까워졌을 무렵 길을 잘못 들어섰다. 화려한 리조트 호텔 건물을 돌아가자 조경이 잘 된 정원이 나왔다.

루이 언니와 나는 밤바다를 바라보며 너른 데크길을 따라 걸었다.


- 여긴 신혼부부들이 오는 덴데... 언니랑 걸으니까 좋다.


그녀의 허리께에 슬쩍 팔을 두른 채로 그 자리에 섰다. 보름달에 가까운 달에는 무지갯빛 달무리가 아른거렸고, 저게 은하수인가 싶을 정도로 별들이 많았다.




빔바다를 바라보는 울타리 앞에 나란히 서서 우리는 수평선의 불빛을 쳐다았다. 한 줌 재가 되어서 육지로 떠난 H를 각자 말없이 배웅했다.


루이 언니는 H에게 더 많은 시간을 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작게 울음을 삼켰.

하지만 나는 언니가 지금 내 옆에 있어서 좋은 것처럼, 살아생전 H도 그랬을 거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