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한테 너는 특별해

생각지도 못했던 다정한 한 마디

by 유랑

이른 저녁이었는데도 서귀포에서 애월로 가는 지방도로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운전을 하다가 조수석에 있는 수련 언니의 안색을 흘낏 살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언니는 방긋 웃었다.


- 있잖아요, 어제 언니랑 루이 언니 하귀 에이바우트에서 커피 마셨다면서?

- 응, 그랬지.


나는 뜬금없이 말을 꺼냈다.

내 차는 하도 낡아서 라디오 외에는 음악을 들을 방법이 없었는데 국도에서는 주파수가 안 잡혔다. 어색한 침묵을 깨기 위해서 아무 말이나 떠든 거였다.

하지만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 그녀는 크리스마스 트리 알전구 불이 켜지듯 사랑스러웠다.


- 그저께 언니가 전화했을 때, 나 하귀 에이바우트에 있었는데.

- 뭐? 정말이야? 근데 왜 말을 안 했어?

수련 언니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언성이 살짝 높아졌다.


- 가까운데 있다고 하면 신경 쓰일까 봐. 저녁에 애기 혼자 놔두고 나오기 그렇잖아.

- 그래도 말을 하지...

- 말했으면... 언닌 애기 놔두고 왔을까?

- 그럼, 당연하지. 난 네가 서귀포에 있는 줄 알았어. 우리 집 근처인 줄 알았으면 바로 나갔지.

- 내가 원래 그렇잖아. 근데 어제는 나 루이 언니한테 먼저 술 마시자고 했었다. 담번엔 언니한테도 커피 마시자고 할까 봐.

수련 언니가 오랜만에 전화를 했을 때 나는 혼자서 카페 이층에 앉아한 시간째 울고 있었다. 오랜만에 전화한 수련 언니는 '너처럼 속시원히 울기라도 하면 좋을 텐데... H가 그리 갑자기 떠나다니 믿어지지 않아'라며 넋두리하듯 말했다.


- 담부턴 가까운데 있다고 말을 할게요.


웃으려고 했는데 자꾸만 한숨이 나왔다.

전날 저녁 나는 루이 언니와 술을 마셨고 다음날에는 트래킹 모임에서 다 같이 섬 트래킹을 나갔다.

바위 투성이 섬의 비경에 김탄 하며 즐겁게 걷다가 모여 앉아 수다를 떨고 간식도 먹었다. 마치 H의 죽음을 까맣게 잊어버린 것처럼.


하지만 저녁에 모임이 파하고, 수련 언니와 어두운 차 안에 단둘이 남자 나는 또 H의 얘기를 꺼냈다.

그녀가 죽었고 이미 화장을 하고 뼛가루만 남아서 추모공원에 안치되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아니, 방금 전 우리가 서귀포 앞바다 무인도로 건너가서 트래킹을 했다는 게 더더욱 꿈만 같았다.


- 언니들은 가족이 있으니까 나는 평소에 폐 끼치면 안 잖아요. 근데 H가 떠나는 걸 보니까 그냥 마지막에 옆에 있는 사람이 친구고 가족.

- 그렇지.

- H 남동생하고 부모님은 일 년에 몇 번 보는 건데, 나랑은 한 달에도 몇 번씩 같이 걸었어. 나는 우리가 트래킹 모임에서 오다가다 만난 사이라고 여겨서 속마음 털어놓은 적도 없었는데.


심정지로 쓰러진 H를 싣고 가던 119 대원이 마지막 통화기록을 보고 연락했던 사람은 나처럼 트래킹 모임에서 그녀를 안 지 겨우 서너 달 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속마음을 털어놓으면서 연락해서 전화로 수다를 떨거나 따로 만났었나 보았다.

H의 장례식장을 삼일 동안 지키면서 조문객을 받았던 이들도 그들이었다.


- 담부턴 그냥 언니랑 커피 마시고 싶다, 술 마시고 싶다 말을 할까 봐. 미리 폐 끼칠까 봐 걱정부터 하지 말고.


말을 하면서도 나는 내가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속으로 생각했다. 만약에 안 된다고, 지금은 못 나간다고 한다면 내가 그런 거절을 감당할 수 있을까. 피치 못할 사정이라고 쿨하게 이해할까. 그들에게는 사랑하는 가족이 우선이고 가끔씩 혼자 있는 시간도 필요한데. 나럼 우울을 전염시키는 에게까지 나눠줄 시간과 소모할 기력이 있을까.


어둠 속에서 운전을 하는데 수련 언니가 말했다.

- 근데 있잖아. 너는 나한테 특별해.

- 왜요?

의외의 말에 저절로 톤이 약간 올라갔다.

- 예전에 비 오는 날 밤에 나 집까지 태워준 적 있잖아. 그땐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었는데.

- 아... 그거야 저는 시간도 많고 30분만 돌아가면 되는데... 언니 집에는 애기 혼자 있으니까...


수련 언니의 딸은 중학생이었지만 늦둥이 외동딸이라 우리는 애기라고 불렀다. 나는 언니가 나 때문에 아이를 혼자 놔둘까 봐 마음이 쓰였다. 내가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고 카페에서 우는 건 내 문제였는데 그 때문에 언니의 아이에게 피해가 가게 할 수는 없었니까.


하지만 나를 바라보는 수련 언니의 눈빛은 늘 따스했던 거 같다. 저녁에 갑자기 전화했던 언니도 H를 생각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슬퍼할 사람이 필했던 것 같다. 그럴 때면 기꺼이 만나서 같이 울어도 되었을 텐데. 카페에서 따듯한 차를 시켜 놓고 손에 한 움큼 쥔 갈색 종이 냅킨이 눈물로 흠뻑 젖도록 슬퍼해도 괜찮았을 텐데. 나는 갖은 청승을 떨어놓고도 단단히 울타리를 친 채로 아무도 들여놓지 않았나 보다.


언니를 집 앞에 내려주고 차창을 내리고 손을 흔들었다. 수련 언니도 마주 손을 흔들었다. 차를 몰면서 그녀가 한 말을 생각했다. '나한테 너는 특별해'라는.


의외의 장소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들었다.


제주로 내려와서 세상천지 혼자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죽어도 슬퍼할 사람이 없으니 잘 되었다고 여겼었는데.

가족도 아닌 이들과도 새로운 인연이 시작될 수 걸까.

그 순간에는 그게 싫지은 않았던 게, 나는 좀 외로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