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마침내 도착한 그곳이 천국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나'와 화해한다, 그도 부디 그 귀여운 청년으로 돌아갔으면

by 유랑

크리스마스 시즌에 사촌언니랑 여행을 왔다가 서귀포에 일 년 살기 집을 얻었다.

전남편 - 그때는 남편이었던- 은 생활의 기반이나 인간관계가 전부 다 수도권에 있는데 제주도로 가고 싶지는 않다며, 정 원한다면 한 달 살기 정도만 해보자고 했었다.




한 달만 있기는 싫었던 나는 제주도 한 달 살기 집들은 너무 비싸니까 일 년 살기 집을 얻어놓고 돌아가고 싶으면 중간에 집을 빼자고 했다.

그는 제주도 공기가 좋긴 하지만 육지와 별다를 바 없다고 했다.

나는 달랐다. 제주는 나에게 별천지로 보였다. 세상은 원래 차갑고 딱딱하고 비정한 콘크리트로 이뤄진 줄 알았는데 제주도는 그렇지 않았다. 지금도 나는 목조주택 데크에 앉아, 귤창고 건물을 타고 올라가서 바람에 한들거리는 초록빛 담쟁이 이파리를 보면서 이 글을 쓴다.


제주도에서 맞았던 첫 봄, 마른풀 사이로 고개 내미는 고사리순을 꺾어오고 뽀얀 진주알 같은 달래 뿌리를 캐왔을 때 그는 지저분한 풀 속에 개미가 있다며 질겁했다.

고사리와 달래를 그가 싫어할까 봐 집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주차장 벤치에서 다듬으면서 그를 떠날 결심을 했다. 그가 미운 게 아니라 우리는 너무 다르다고. 나란히 가기에는 결이 너무 다른 사람들이라고. 그가 가고 싶은 길과 내가 가고 싶은 길이 다르다고.


젊은 날 나는 그를 무척 사랑했던 것 같다. 그의 손을 잡고 있으면 세상의 일부가 됐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무척 차분하면서도 보도블록 사이에서도 노란 꽃을 피우는 잡초처럼 흔들리지 않는 강인함을 갖고 있었다. 그는 콘크리트 건물에서도 편안하게 잘 지냈고 달리 의지할 종교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는 도시에서 오랫동안 마음이 병들었다. 제주도에 와서야 그걸 알았다. 봄비를 맞아 쑥 올라오는 고사리를 꺾을 때 나는 태어났다가 시들고 죽는 자연의 흐름과 우주와 신을 느꼈다. 나는 혼자서 이곳에서 책 읽고 글 쓰는 길을 선택했다.


제주도 서귀포에 사는 쉰한 살 육체에는 스물여섯 살 먹은 푸릇푸릇한 어린 영혼이 산다.

대학을 졸업하고 첫 직장의 조직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피하듯 대학원행을 택했던 여리고 어린 심성을 가졌던 소심한 여자아이가. 대학을 졸업하고도 밥벌이를 못해서 또 손을 내밀어야 하는 부모님께 죄송하고 앞으로 뭘 먹고살지, 어떻게 하면 세상에 민폐 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지 두렵고 막막해서 죽고 싶기까지 하던 그 여자아이는 선택할 수만 있다면, 가난한 젊음과 얼마 안 되는 황금을 기꺼이 바꾸었으리라.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다 가졌던 파우스트가 영혼을 팔아 젊음을 선택했듯이.


쉰한 살에 이혼한 나를 보기 싫지만 어리석고 갈 곳 없던 그 여자아이를 가엾게 여긴다. 비췻빛 바다에 사시사철 초록빛이 가득한 오름과 한라산이 우뚝 솟은 제주도에서 비바람 피할 지붕을 마련해 주고 하루 세끼 식사와 커피를 사 먹을 수 있는 용돈도 주고 싶다.

그렇게 나는 서귀포에서 머무는 나와 화해한다. 어리석은 여자아이가 좀비처럼 숨만 붙은 채 고통스러웠던 이십 년 세월을 흘려보낸다. 그만 꿈에서 깨어나라고 속삭인다.


지금은 친구가 된 쉰세 살 그에게도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고집 세고 욕심 많던 그 여자의 인생을 책임지느라 등짐 진 노새처럼 무거운 걸음을 뚜벅뚜벅 떼야했던 가엾은 그 청년에게도, 악몽은 끝났으니 더는 그 여자를 잃을까 상처 줄까 두려워 말고 삶에 대한 낙관에 가득 찼던 사랑스러운 그 청년으로 돌아가라고 말하고 싶다.



마침내 도착한 서귀포는 천국처럼 아름답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천국은 아니다.

여전히 나는 외롭고 힘들어서 밤이면 자주 운다.

그래도 그와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잘 알고 있으므로, 길고 긴 꿈을 함께 꾸었던 그에게 미안하고 애틋하면서도 이제는 친구가 되어준 것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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