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추석에 그를 만나러 갈까 말까

외로워도 제주가 더 좋아

by 유랑

지난해 그가 수도권으로 떠나고 제주도에 혼자 남아서 맞은 첫 명절에는 지인과 코미디 영화를 봤다. 나름 재미있었다.

그렇지만 다음 명절에는 뭘 하나.

혼자서 한라산이나 갈까.

마흔 살 넘은 제주 독신자들이 명절 보내는 방법 1위가 ‘혼자서 한라산 가기’였는데 내가 보기에도 썩 괜찮아 보였다.



올해 초 이혼수속 하러 올라가서 그에게 지난 추석에는 뭐 했냐고 물었다. 그냥 혼자서 집에 있었다고 했다. 이혼한 홀몸으로 가족들이 모이는 고향 부모님 댁에 가기에도 그렇고 해서 전화만 드리고 평소처럼 티브이를 봤다고.

기념일에 의미를 두지 않는 그와 달리 명절날 외로움 타는 내가 처량해 보였는지 앞으로 명절에 정 갈 데가 없으면 같이 보내자고 그가 말했다.


칠월에 그가 다녀가고 시원하다가 또 외롭고 쓸쓸하던 밤, 서울행 추석 비행기표를 알아봤다. 전남편이라기보다 전 남자친구가 된 그와 서울에서 전시나 보러 갈까 했다. 내가 간다고 하면 오지 말라고 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아주 반길 것 같지도 않았다. 나도 아주 막 가고 싶은 건 아니었다.


전시는 혼자 보는 게 더 집중이 잘 된다. 수십 년 동안 같이 살면서도 대화가 뜸했는데 이제 와서 그와 별다른 감상을 나눌 것 같지도 않았다. 게다가 나는 육지가 싫었다. 복잡한 서울이 싫었고 그곳에서 있었던 괴로운 기억들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추석 명절 시즌 비행기표는 아주아주 비쌌다. 핫한 시간대를 피해서 날짜를 바꿔봤지만 가끔씩 나오던 땡처리 비행기표는 흔적도 없었다. 추석 연휴에 개천절과 한글날까지 빨간 날이 이어져서 해외로 나가는 이들을 위해 항공사에서 비행기 편을 해외로 돌렸기 때문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9월, 제주에서는 ‘아트트랙 2023’이라는 대규모 전시가 열렸다.

제주도 내 열아홉 군데 미술관과 팝업 스토어, 갤러리 카페 등에서 서양화와 조각, 사진 작품 등을 전시했다.

한 번 마음먹고 전시를 보러 나가자 나름대로 재미있고 시간이 잘 갔다.

평일에는 한적한 전시회장을 지키는 직원분께 도슨트를 부탁하면 흔쾌히 친절하고 상세하게 전시 안내를 해주었다.


제주는 한낱 섬일 뿐이지만 넓다면 또 넓기도 한 곳이다.

남쪽 서귀포에서 동쪽 구좌읍까지 가려면 왕복 세 시간이 걸렸다. 밤에 가로등도 없는 캄캄한 지방도를 몇 시간이나 운전하는 일은 나름 긴장도 되고 피로하기도 했다.

전시 투어는 여행을 떠난 것만큼이나 재미있었다.

한 곳에서 전시하는 작품 수가 많지 않았으므로 하루에 두세 군데씩 돌다 보니까 스탬프북에 열 곳 도장을 채워서 굿즈 열쇠고리와 엽서 세트를 받았다.

잡지도 한 권 받았는데 나는 이미 갖고 있었으므로 지인에게 선물하자 무척 기뻐했다.


이혼한 후 처음으로 혼자 맞았던 명절은 무척 이상하고도 심란했다.

그래서 전남편과 명절을 보내겠다는 괴상한 생각까지 했었다.

하지만 두 번째 맞는 추석에는 나도 잘 지내고 그에게도 연락이 없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서서히 멀어지나 보았다.

사흘 후면 추석인데 전시는 아직 여덟 군데가 남았다. 다행히 명절 연휴에도 대부분 오픈한다. 나가기 싫으면 집에서 점찍어뒀던 드라마를 하루종일 정주행해도 된다. 명절에도 갈 데 없는 이혼녀로 세상천지 혼자라는 청승도 남의 일 같다. 언제 또 엄청난 자기 연민의 폭풍이 밀려올지도 모르지만.


콘크리트 건물과 도로와 교량이 크고 광대하고 복잡한 육지에서는 자꾸만 무기력해졌다. 제주도는 서쪽 끝에서 동쪽 끝까지 자동차로 두 시간이면 갈 수 있으므로 마음 내키면 어디 한 번 가볼까 싶은 생각이 든다. 더군다나 제주는 어디든 풍경이 무척 아름다우므로.




전시 투어 스탬프를 또 찍어서 또 굿즈와 잡지 선물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이혼한 전남편과 어떻게 친구가 되어가고 멀어져 가는지도 까먹기 전에 써놔 하고, 전시 다녀온 블로그도 그때그때 정리해야 한다.

추석에도 혼자서 글이나 열심히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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