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한밤중에 전남편에게 전화하기
외로우면 혼영이나 하세요
밤 열 시가 넘어서 그에게 전화했다. 그는 바로 받았다.
- 뭐 하냐? 드라마 본다. 무슨 드라마? 그냥 공중파...
내 용건은 허접했다.
그가 원한다면 내 애플뮤직 아이디를 공유해 주겠다고. 요즘 공간뮤직을 애용하고 있는데 썩 들을 만하고 무척 마음에 든다고.
카톡으로 던지면 끝날 용건을, 그냥 좀 외로워서 수다를 떨고 싶었다. 그도 비슷한 마음이었는지 이틀 전에 드디어 에어컨을 샀다는 스토리를 자세히 늘어놓았다.
그는 더위를 안 타고 구두쇠라서 새로 이사한 아파트에서 에어컨 없이 버틸 줄 알았는데 세입자가 에어컨이 약하다고 컴플레인을 해와서 교체해 줄 제품을 알아보다가 마침 괜찮은 게 있길래 자기 것도 하나 더 질렀다고 했다.
제조사 반짝 프로모션을 이용해서 최고급 사양을 얼마나 싸게 샀는지 자랑을 늘어놓았다.
나는 쿠팡에서 미니 제습기를 구매했다고 말했다. 서귀포는 워낙 습해서 에어컨을 제습 모드로 틀어놓아도 드레스룸에 곰팡내가 난다면서.
그는 그게 꼭 필요하냐면서 사려면 비싸더라도 제대로 된 큰 걸 사야지 쪼끄만걸 사서 제 기능을 하겠냐고 걱정했다.
나는 큰 건 너무 비싸고 거추장스러우니까 일단 작은 걸 하나 사서 드레스룸에 종일 틀어야겠다고 대꾸했다.
그는 애플뮤직 같은 걸 유료로 이용하는 건 낭비라며 유튜브에 얼마나 좋은 게 많은지 알려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나는 아이폰 구매 후 육 개월간 무료이용 중인데 그의 아이패드로도 한 번 들어보라고 권했다. 공짜라는 말에 그는 쉽게 넘어왔다.
전화를 끊고 생각했다. 여태 둘이 붙어 있었다면 이틀 내내 싸우기만 하고 백만 원짜리 에어컨과 오만 원짜리 미니 제습기 둘 다 못 샀을 거 같다고.
그가 구두쇠라고 욕하지만 돌이켜보면 나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추운 걸 싫어하고 나는 더위라면 질색이었다. 겨울에는 보일러 설정 온도로 신경전을 벌였고 여름에는 에어컨 가동에 보복이 따랐다.
그날따라 빈집에 혼자 돌아온 게 처량해서 그가 좀 그리웠나 본데, 같이 있었다면 또 싸웠을 확률이 높았다.
밤이면 나는 재즈 음악 들으면서 책 읽거나 글 쓰는 게 좋고 그는 티브이 채널을 돌리면서 드라마나 예능을 보는 걸 좋아하니까. 하다못해 야식 취향도 나는 베이글에 크림치즈를 발라먹고 그는 매운 라면을 꼬들꼬들하게 끓여 먹으니까.
낮에 만난 지인 커플은 둘 다 트래킹을 좋아해서 사흘이 멀다 하고 일주일에도 서너 번씩 나가서 함께 걷는데 그와 나는 공동의 취미가 없었다.
내가 너무 이기적인가? 그가 문제인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이다.
이타심을 발휘할 수 있는 건 타인을 배려하는 인성이 되고 베풀만한 여건이 되기 때문이다.
잉꼬처럼 사이좋은 지인 커플도 내가 모르는 속사정이 있을지도 몰랐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지옥이 있다. 그걸 캐물어서 나보다 못한 점이 하나라도 있는 걸 확인하고 만족할 필요가 없다. 나는 무심코 음식 솜씨가 없어서 소박을 맞았다며 신세타령을 하다가 헤어진 전남편이 까탈스러웠다며 그를 흉봤다.
못나게스리.
그와 헤어져서 더 이상 부부가 아니라 친구가 된 덕분에 나는 제주도로 와서 아침에는 귤밭 산책을 나가고 낮에는 노트북으로 블로그 원고를 쓴다. 내키는 대로 아무거나 글을 쓰고 밤에는 재즈 음악을 들으면서 책을 읽는다.
그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펜하이머’가 곧 개봉하는데 그거라면 영화관 가서 볼 만할 거 같다고 했다. 그가 그토록 멀리 있지 않다면 영화 한 편 같이 보고 저녁도 먹자고 데이트 신청할 텐데.
그렇지만 아무리 외롭고 쓸쓸해도 삭막한 수도권의 콘크리트 고층아파트로 그를 만나러 가고 싶진 않다. 그도 같은 마음이라서 서귀포 오두막집에 사는 나를 만나러 오지 않는다.
에어컨이 없었더라면 어쩌면 그가 한 번 더 나를 만나러 올 수도 있었을 텐데, 구두쇠가 백만 원짜리 에어컨을 사다니 이제 올 일 없겠네.
아쉬워하는 내 마음이 웃겼다.
생각난 김에 이틀 후 광복절에 개봉하는 영화 '오펜하이머'나 혼자 보러 가게 예매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