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결혼하지 말고 연인으로만 지낼 걸 그랬어

바닷가에서 친구들과 피크닉 하기

by 유랑


여름휴가를 함께 보냈던 그가 떠나고 나서 제주에서 알게 된 지인 두 커플과 바비큐 피크닉 파티를 했다.

한 커플은 나와 연령대가 비슷했고 다른 커플은 열 살 아래였다. 두 커플 모두 결혼하지 않고 사실혼이라고 할까 꽤 오랜 세월 동거하는 사이였다.




두 커플 다 트래킹 동호회에서 친해졌는데 중년 커플은 산을 잘 타고 제주 자연이 좋아서 팔 년 전에 육지에서 내려와 정착했다. 어린 커플은 남자 쪽이 제주사람이었는데 하도 제주에 들락날락하면서 고등학교 동창들과 술 마셔 대니까 차라리 제주 가서 살기로 한 거였다.


중년 커플은 둘 다 산악인이자 트래커였다. 둘이서 길도 없는 험한 계곡이나 산길을 헤치고 다니는 걸 즐겼다. 여자 쪽이 남자보다 더 거침없었다. 오름 열 개를 하루에 누비고 다니는 걸크러쉬 언니였다.

그들은 제주도 관공서와 가게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며 생활비를 충당했고 트래킹 다니는 취미활동이 삶의 우선순위였다.


어린 커플인 철이와 선이는 삼 년 전 제주로 와서 각자 직장을 다니다가 몇 달 전 항구 근처에 작은 술집을 차렸다.

맛있는 안주로 아늑하게 술 마시는 가게 차려서 사랑하는 철이와 친구들과 다 함께 날마다 즐겁게 술 마시는 게 선이의 꿈이었다.

선이는 손이 무척 크고 요리를 잘하는 데다가 정이 넘치는 따스한 성품이라서 남들에게 맛있는 것을 해 먹이는 걸 낙으로 알았다.

생판 남인 나까지도 살뜰하게 챙기며 맛있는 것을 먹이고 싶어 할 정도였으니까.


포구에 도착했을 때 중년 커플은 먼저 와서 정자에 자리를 잡아놓고 있었다.

여름 햇살은 눈부시고 비췻빛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가 환상적인 오션뷰를 자랑하며 시야 끝까지 펼쳐져 있었다.

우리는 한가롭게 바닷바람을 쐬었다.

캠핑 의자에 편안하게 앉아서 집에서 싸 온 연둣빛 아오리사과를 조각내어 먹었다.

바비큐 파티에 빈손으로 가는 게 미안했지만 모임 주최자 철이 커플이 장을 보고 음식도 준비하기로 했으니까.


곧이어 도착한 철이 커플이 중년 커플과 힘을 합쳐서 한바탕 요란하게 타프를 쳤다.

해가 중천으로 갔다가 서쪽으로 옮겨가도 그늘이 생기도록 머리를 써가며 바람에 엎치락뒤치락하는 타프를 고정하느라 힘을 뺐다. 그러고 나서 철이와 선이는 자동차에서 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바비큐 화로와 숯, 토치, 테이블, 의자, 그리고 아는 정육점에 특별히 주문해 온 등심과 생갈비, 매운 양념갈비와 달짝지큰한 양념갈비, 프렌치랙 양갈비까지 무려 다섯 종류의 질 좋은 생고기와 찬합에 싸 온 나물반찬, 바로 조리할 수 있도록 갈무리해 온 된장찌개 등등. 집게, 국자, 음료수, 종이컵, 김밥 등등 피크닉 도구와 음식들이 끝도 없이 나왔다.


철이는 그날따라 좀 까칠했다. 다 같이 피크닉 와서 가만히 앉아서 먹기만 하는 사람들이 제일 짜증 난다고. ‘가만히 앉아서 날로 먹으려던’ 중년 커플과 나는 철이 눈치를 보면서 살살 어르고 달랬다.

늘 생글생글 웃던 철이의 눈가에 시커멓게 다크서클이 내려와 있었다.

그럭저럭 철이가 바비큐 화로에 불을 붙이고 고기를 구워주는데 선이가 ‘악, 어떡해!’ 외마디 탄성을 질렀다. 장 보고 온 마트에 젓가락과 생수를 두고 왔다는 것. 가뜩이나 철이 기분도 나쁜데 선이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했다.


'가만히 앉아서 날로 먹으려던' 내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얼른 궁둥이를 뗐다.

- 요 앞 편의점으로 차 몰고 갔다 올게!

밥값 할 기회다 싶어 잽싸게 일어나는 순간 선이가 ‘언니 고기 한점 먹고 가요!’라며 잘 익은 생갈비를 집게로 콕 집어주었다.

질 좋은 고기는 버터맛이 촬촬 흘렀다. 편의점 앞에 차를 세우고 생수와 물티슈를 사고 나무젓가락을 몇 개 얻어왔다.

철이가 생갈비에 이어서 프랜치 랙 양갈비를 구워주었다. 바다를 배경으로 잘 익은 양갈비를 들고 인증샷을 찍었다.

# 지금이순간 #제주도에서제일잘노는사람들에꼽사리 낀#


철이는 불 피우고 고기 굽는 솜씨가 일품이었다. 본인도 사람들 모아놓고 노는 걸 좋아했다.

그날따라 표정이 안 좋았던 건 며칠째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일을 했기 때문이었다.

철이의 짜증에 선이가 미안해하며 해명을 하는데 점점 사랑과 전쟁? 같은 스토리가 술술 나왔다.


철이 커플이 항구에 작은 술집을 차린 게 작년 시월이었다.

손 크고 인심 좋은 선이는 아는 사람들은 물론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맛있는 걸 먹이길 좋아했다.

소고기가 듬뿍 든 밀푀유나베와 파김치를 곁들인 육전, 얇게 썬 오이와 함께 마요네즈에 찍어먹는 명란 버터구이, 감자와 고구마를 넣고 푹 익힌 닭볶음탕 등 안주가 너무 푸짐하고 맛있어서 누구나 감탄했다.


헌데 재료 값은 날로 오르고 물가는 비싼데 아는 사람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푸짐하게 먹이고 싶은 선이는 가격을 올려받질 못했다.

소자본 가게가 자리 잡기도 쉽지 않아서 먹고살 만한 매출이 안 나오는 모양이었다.

궁여지책으로 철이와 선이 커플은 몇 달 전부터 알바를 시작했다.

저녁 여섯 시부터 새벽 두 시까지 가게 문 열기 전 낮시간에 철이는 펜션 청소를 하고 선이는 근처 식당에서 일한다고 했다.


장을 보고 재료를 다듬거나 가게 청소를 하려면 낮에는 쉬어야 할 텐데, 몸 쓰는 아르바이트까지 하다 보니 피곤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사소한 일에도 신경이 곤두서서 한마디 하면 다른 한쪽도 짜증을 냈다.

꼼꼼한 철이는 펜션 청소를 빈틈없이 하고도 집에 와서도 집안일을 다 해치워야 직성이 풀렸다.

가게에 서서 밤늦게까지 안주 만들어서 장사하고 낮에는 식당일까지 하느라 피곤한 선이는 집에서는 일초라도 쉬고 싶었다.

평소엔 서로 눈에서 꿀이 떨어지는 것처럼 사이좋은 커플인데 이날은 서로 눈길을 피했다.


‘요즘 너 빨래랑 설거지 넘쳐나는데 집안일 너무 안 한다’며 철이가 틱틱거리자 선이가 한숨을 쉬었다.

선이는 철이한테는 말도 못 하고 우리를 보면서 푸념했다.

‘뭐 하러 남의 집을 광이 번쩍번쩍 나게 닦아놓고 몸 힘드니까 짜증을 부릴까’하면서.

‘잠은 서너 시간도 못 자면서 넷플릭스랑 웹툰은 몇 시간이나 보고 있다’고 일러바쳤다.


남의 일이므로 나는 심각하지 않았다.

‘알바까지 하려면 너무 힘들겠다’,

‘그래도 넷플릭스랑 웹툰은 봐야지.’라고 양쪽 다 골고루 편들어주면서 웃기만 했다.

얼마 전에는 선이의 친구가 와서 밤늦게까지 술 마시고 신세타령 하는 거 들어주느라 설거지를 안 해놓고 잠드는 바람에 철이가 빡친 모양이었다.

그래도 선이는 철이가 코 파는 거, 트림하고 방귀 뀌는 것까지 귀엽고 사랑스럽다고 했다. 헐헐!


철이와 선이는 서로 구속하고 싶지 않으므로 앞으로도 결혼하지 않을 거라고 했다. 무려 구 년째 그 마음 변치 않고 약속을 지켰다.

풍경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소금기 머금은 바람을 몇 시간째 쐬다보니 앉아서 고기만 먹었는데도 조금 피곤했다.




갯바위에 내려가서 그림처럼 아름다운 바다를 바라보다가 파도가 덮쳐와서 물벼락을 맞았다.

나는 그와 이혼하고 헤어져서도 잘 지냈다.

결혼이란 허울로 구속했을 뿐 서로 아끼고 사랑하지 않았으니까.

오후 느지막이 놀고먹던 자리를 치우면서 철이 선이 커플에게 못 참고 한마디 꼰대질을 했다.

너희 둘은 내가 제주에서 만난 최고의 커플이라고, 결혼으로 구속하지 않고 서로 아끼는 모습이 너무 멋져서 늘 감탄했다고…

철이는 머쓱해했다. 선이는 앞으로도 이쁘게 잘 살겠다며 함빡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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