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나는 저녁에 조용히 책 읽는 게 좋아
주말에는 이틀 연속 바다로 나갔다. 기암괴석이 멋들어진 서귀포 소천지로 가서 나는 갯바위에 캠핑 의자를 놓고 얕은 바닷물에 다리와 발을 담궜고 그는 ‘니모’가 있다며 스노클링 물안경을 쓰고 물속에 들어갔다나왔다 했다. 날씨가 맑았더라면 인어가 튀어나올것처럼 신비한 진초록빛 바다였을텐데 흐린 날씨가 아쉬웠다.
소금물을 씻어내러 소남머리 용천수에도 가고 다음 날엔 협재 해수욕장으로 가면서 한 번뿐인 여름휴가를 즐기기 위해서 나름 애썼다. 그도 노력했고 나도 최선을 다했다.
그러다가 집에 오면 또 살얼음판이었다.
그는 거실 소파에서 맥주를 마시면서 시끌벅적한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싶어했는데 연예인들이 깔깔대며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머리가 아팠다. 그는 내 눈치를 보고 역사물 다큐멘터리 같은 걸로 채널을 바꿨는데 재미없고 마음에 안 드는 기색이었다. 기분이 나빠진 그는 리모콘이 잘 작동이 안된다느니 TV 채널과 화면 설정을 이상하게 해놓았다느니 등등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평가와 불평을 늘어놓았다.
저녁 시간에 나는 책을 읽거나 노트북을 열고 생각에 잠기면서 글 쓰고 싶었지만 친구가 왔는데 방문을 닫고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았다. 둘 다 재미없는 역사물 예능 프로그램을 틀어놓고 소파에 나란히 앉아서 그의 말에 건성으로 맞장구를 쳤다.
속으로 이 인간 언제 가나 했지만 언제 갈 거냐고 대놓고 묻지는 못했다. 하다못해 이혼하러 올라갔던 나에게도 그는 언제 갈거냐고 묻지 않았으므로.
월요일 아침에 갈 것처럼 굴던 그는 바쁜 일도 없다며 미적거리다가 저녁 티켓을 끊었다.
여름휴가 마지막 날 특별히 하고 싶은 건 없다고 해서 미술관 한 곳에 더 들렀다가 블루보틀 카페에 가보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또 취재에 끌고가서 미안했지만 그도 좋다고 했다. 그러고보면 그와 사귈 때도 데이트는 전시관람 아니면 영화관람이었다.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두번째 미술관에서는 가볍게 사진 몇 장만 찍었다.
원고료 몇 푼에 내가 그렇게까지 노력하고 일을 잘 하고 싶어하는 걸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안정적인 직장에 취직한 것도 아닌데.
이제는 아내도 아닌 여자의 차를 운전하고 싶지도 않았고 마음에 안 드는 운전에 지적질도 못하므로 그는 차에서 한잠 늘어지게 자다가 내릴 무렵 피곤하다며 인상을 썼다.
제주도에서 보내는 여름휴가 마지막 날, 블루보틀 주변 천미천으로 갔다.
숲 속에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천미천에는 웨딩촬영하는 커플이 눈에 띄었다.
우리는 둘 다 번거로운 걸 싫어해서 웨딩촬영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생략했는데.
하얀 드레스와 예복을 입고 나온 젊은 커플에게는 안개비가 내릴락말락하는 초록 숲에서 포즈를 잡느라 머쓱했던 이 시간도 애틋한 추억으로 남겠구나, 이혼한 전남편과 걸으며 나는 멍하니 생각했던 것 같다.
전처인 나에게 야외 풍경사진 찍는 법 알려주던 그도 비슷한 생각을 했을까.
‘저기 웨딩사진 찍는 애들 있다’하던 그 사람도, 앳되고 귀여운 젊은이들을 보면서 스무 해 전엔 이렇게 될 줄 몰랐던 우리의 현재를 생각하며 회한에 젖었던 걸까.
밝고 환한 분위기의 블루보틀 카페에는 발랄한 음악이 흘렀다. 통유리창 밖으로 널따란 제주도 중산간 풀밭과 한 줄로 늘어선 어린 삼나무들과 동그란 오름이 보였다. 나는 리에주 와플에 썸머라떼를 마셨고 그는 우유맛이 풍부한 아이스크림을 스푼으로 떠 먹었다. 우리는 둘 다 노트북을 가져왔지만 와이파이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악명이 자자한 블루보틀에서는 그냥 오름멍을 하면서 디저트만 즐겼다.
바로 옆에는 코사이어티 빌리지 리조트도 있었다.
그와 나도 휴양지 리조트에서 보냈던 젊은 날이 있었던가. 이렇게 비싸고 근사한 데는 못 가봤지만 바닷가의 소박한 펜션에서도 우리는 충분히 행복했던 것 같다.
그와 나는 만나서 사랑에 빠졌고 사년간 자주 다투기도 하면서 연애하다가 신축 아파트 전세로 신혼집도 차렸다. 무려 한강이 보이는 조망권 아파트였다.
조직생활에 영혼이 갈리고 한국인 특유의 무한경쟁에 경상도 출신의 학구열까지 겹쳐서 힘들고 피곤하게 살았다. 품어주었어야 마땅했을 연인이자 남편을 사사건건 남들과 비교하며 원망만 했던 모자란 아내였다.
그러다가 결국 우리는 헤어졌다. 새로운 생활에 대한 희망을 갖고 내려온 제주도에서, 밖에 안 나가려는 그를 놔두고 혼자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쏘다니다가 내가 먼저 말했었다. 더는 당신과 못 살겠다고, 당신이 수도권 아파트로 떠나지 않는다면 내가 원룸을 얻어서 따로 나가겠다고.
그는 내 뜻에 따라 수도권 아파트로 떠났고, 이혼을 해주었고, 재산분할 등기도 다 해주었다. 그처럼 착한 남편을 등 떠밀고 이혼녀가 된 나는 어리석고 불행한가.
나와 살면서 그도 행복하지 않았다. 수도권 아파트를 자기 뜻대로 꾸며놓고 사는 그를 보고 알았다.
우리는 둘 다 처음부터 결혼생활이 맞지 않는 인간들이었다. 그는 결혼할 때 울었고 이혼할때도 힘들어했다. 익숙했던 한 시절을 떠나보내는 건 그렇게 아프고 괴로웠다.
그와 나는 좋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제주도 블루보틀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여름휴가를 마무리할 준비를 하던 그도 나와 같은 마음이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