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벨로체
'삼시 세 끼'라는 TV 프로그램을 즐겨보았다. 초창기 시리즈였던가. 정선 편.
그들은 강아지, 염소를 기르고 텃밭도 가꾸고 월동준비로 난로도 설치하느라 바쁜
정선의 농부로 살고 있다.
읍내에 있는 철물점, 그들의 단골집, 어느 날 이서진과 택연 둘은 철물점에 들렀다가 그 집 청년 '동식'이를 찾는다.
동식은 외근 중인가 보다. "동식이에게 우리 왔다 갔다고~ 안부 전해주세요~!" 하며 가게를 나온다.
아 참 정겹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익숙한 미소로 맞아주는 주인이 있는 단골가게.
드라마에서 많이 본듯한 풍경이며 나의 로망의 한 장면이기도 하다.
눌러앉아 사는 곳에도 마음 붙이고 단골집 삼을만한 곳이 마땅히 없건만 며칠 묵게 되는 여행지에서는 꼭 단골집이 생긴다.
지난 겨울 오랜만에 도쿄에 머물며 매일 아침 숙소 앞 '고메다 커피'에서 토스트와 커피로 아침을 먹었다.
한껏 게으름을 피워도 좋겠건만 여행지에서도 난 이른 아침을 시작했다. 시린 아침 공기를 느끼며 입김 후후 불며 촉감놀이 하는게 좋았고 창가에 앉아 바쁜 아침을 시작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게 좋았고 카페의 오렌지빛 따사로운 조명이 좋아서일지도 모르겠다.
출근시간 손님을 응대하느라 바쁜 직원과 매일 눈인사를 나누었다.
오래전 1년간 머물렀던 머나먼 나라, 멕시코의 작은 콜로니얼 풍 도시, 과나후아토 우리 동네의 카페 Veloche(벨로체).
과나후아토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은 날 어둠이 내려앉은 그 저녁,
따사로운 불빛이 켜진 거리, 마리아치 연주소리가 춤추고 있는 자유로운 영혼처럼 느껴지던 이 도시의 인상은 생경하지만 푸근했다.
나보다 두 달 앞서 여기에 둥지를 튼 후배는 어느새 제법 그곳 동네주민 품새였다.
그녀가 떼아뜨로 후아레스를 지나 나를 데려간 곳은 인상적인 인테리어의 카페 벨로체.
그 후 우연히 알게 된 따뜻한 품성의 일본 친구 유카와 미카를 만나 한국어 공부를 하던 곳도,
국적 불문의 학교친구들이 모여 수다를 떨던 곳도,
나의 첫 네이티브 친구 나디아와 늘 해후하던 곳도,
내게 홍차 맛을 알게 해 준 곳도 그곳이었다.
유난히 초콜릿케이크가 맛있었던, 여유로운 주말 한낮 혼자가도 좋을 그런 곳.
그렇게 거의 매일 들르던 나의 단골집, 카페 벨로체.
어느덧 1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귀국할 날이 멀지 않은 어느 날 나디아를 오랜만에 만났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준비로 바쁜 그녀를 한 동네 살면서도 한동안 마주치지 못하던 참이었다.
커피와 초콜릿 케이크를 앞에 두고 한참 나디아와 대화가 무르익을 즈음,
그날도 어김없이 밀크 티 한잔이 내 테이블로 배달되었다.
언제부터인가 벨로체에 들를 때마다 내 앞에 배달되던 밀크 티.
친절한 서버 한 사람이 단골인 내게 호의를 베푸는 것이구나 하고 그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1년이 흘러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날은 마지막일지 모르는 날. 정든 그 풍경을 마주한 기분은 이미 왠지 울컥해진 상태였다.
가까이에 있는 서버에게 불쑥 물었다.
"Quién me regaló este té con leche?" (누가 밀크티를 주시는 건가요?)
- "Alguien" (누군가요)
"Dime por favor... después de unos días voy a salir de aquí para Corea."
(음 알려주세요~ 며칠 후면 제가 한국으로 돌아가거든요)
- "es verdad?" (정말요?)
망설이던 그는 손끝으로 누군가를 가리킨다.
키가 유난히 훤칠했던 벨로체의 서버. 그는 활짝 웃고 있었다.
성큼 그에게 다가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었군요. 고마웠어요. 베풀어준 그 마음 잊지 못할 거예요. 이제야 그 고마운 선물을 해준 사람을 알게 되었는데 제가 며칠 후면 여길 떠나요. 오래도록 기억할게요"
우린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악수를 했다.
그날 저녁, 지인들과 Puerta del Sol이라는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으며 월드컵 예선전을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던 중 후배가 내게 눈짓으로 문 쪽을 가리킨다.
문밖에서 레스토랑의 와이드비전의 축구경기를 지켜보고 있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그 얼굴이 보였다.
우리는 눈이 마주쳤고 미소를 지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주문하지도 않은 밀크티를 전해 받으면서 그 사람이, 그 마음이 그 시절 왜 난 진작 궁금하지 않았을까.
난 과연 그처럼 밀크 티 한잔으로라도 그저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순수하게 전한 적이 있던가.
문득 젊은 날의 내가 후회스러운 이유는 떠나기 전 마음을 담은 작은 선물 하나 그에게 전달하지 않은 나의 무정함, 무심함 때문이다.
그때 내 나이 푸르른 이십 대.
많은 시간이 흘러 지금 난 후회하고 반성한다.
밀크 티 한잔, 작지만 고맙고 애틋한 마음, 그걸 그리 가볍게 생각하지 말았어야 한다.
수차례 전달되는 그 마음, 그 밀크티를 보면서도 '그 사람'이 별로 궁금하지 않았던 나의 무심함에 반성한다.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예쁘게 포장된 초콜릿 상자 하나 그에게 건네리라.
그 따뜻한 마음 더 따스하게 꼭 안아주리라.
그렇게 이 마음 다 건네고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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