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유럽 여행을 하면 꼭 가게 되는 도시들이 있다. 런던, 파리, 로마 이 세 도시는 여지없이 유럽 여행 여정에 포함된다. 각각의 도시는 다른 어떤 곳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관광객들의 선호도가 높은 곳이고, 일주일은 너끈히 머물 수 있을 정도로 볼 것이 풍부한 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 도시가 각각 상징하는 것은 약간 다른 것 같다. 런던이 현대적인 도시라면, 파리는 근대의 도시, 로마는 고대의 도시랄까. 단순히 건물의 규모와 형태, 느낌뿐 아니라 도시 전반에서 느껴지는 분위기 역시 그렇다. 항상 최근의 것, 최신의 것을 추구하는 나에게 로마는 뭔가 다른 도시에 비해 과거의 느낌이 물씬 풍겨 유행에 뒤떨어져 있는 느낌을 주는 도시였다.
지난번 여행에서 로마의 기억이 인상적이지 않아서 그런지 다시 찾아온 것에 대한 기대감보다는 무덤덤한 기분으로 로마 땅을 밟았다. 지난번 여행은 런던-로마-파리의 순서, 이번 여행은 런던-파리-로마의 순서로 방문했다. 며칠 전 로마 피우미치노 공항에서 내리면서까지 로마에 대한 기대감은 무척 적었다.
하지만 웬걸? 여행을 시작하고 하루 만에 로마가 너무 많이 좋아져 버렸다. 왜 지난번에는 로마가 좋지 않았고, 이번에는 좋아졌는지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봤다.
결론은, 로마의 날씨는 파리와 런던의 그것보다 더 화창하고 좋았고, 숙소도 런던의 그것보다 좋았다. 음식값도 런던과 파리의 그것보다 저렴했고, 무엇보다 젤라또가 너무너무 맛있었다. 젤라또가 바로 핵심이었다.
나의 걸으면서 여행하는 것을 좋아한다. 많이 걸어 다니면서 내 눈에 여행지를 담는 것을 좋아한다. 내 손에 익은 카메라로 거리의 풍경과 사람들을 찍는 것을 좋아한다. 걷는 것 대신 지하철이나 버스를 탄다면 무척이나 간편하게 그리고 빠르게 이동할 수 있지만, 결국 그렇게 여행하고 보면 기억에 남는 것은 역의 이름뿐이었다. 그런 역의 이름 역시 며칠 지나면 금세 잊어버리곤 했었다. 하지만 거리를 걸으면서 마주한 풍경과 사람들, 지나쳤던, 방문했던 가게는 생생히 기록되어, 가끔 떠오르는 추억이 된다. 걷다가 힘들면 잠시 벤치에 앉아 쉬기도 하고, 카페에 들어가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누리기도 했다. 한국에서 카페가 나의 과제를 위한 공간이었다면, 여행지의 카페는 쉬면서 다시 걸을 힘을 얻는 공간이었다. 그렇게 커피 한 잔의 힘으로 다시 걸음을 재촉하고, 나의 머릿속을 다시 각종 기억으로 채울 수 있었다.
로마에는 카페뿐 아니라 젤라테리아가 있다. 그곳에서 지금껏 자주 마셨던 커피보다 더 달콤하고, 작은 숟가락으로 한 입 떠먹으면 괜스레 사람의 기분까지 좋아지게 만드는 젤라또를 먹을 수 있었다. 로마 여행은 곧 젤라테리아 여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유명 젤라테리아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유명한 만큼 사람이 많이 몰려서 비록 앉을 자리조차 없는 가게가 태반이지만, 맛을 보면 그런 불편함 정도 충분히 감수하고도 남았다. 오히려 그런 불편함이 있어서 더 맛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너희가 불편해도, 맛을 보면 찾아오게 될걸? 이런 이유 있는 자부심이 젤라또에서 느껴졌다.
커피와 젤라또로 기운을 충전해서 열심히 로마를 걸어 다녔더니 로마의 새로운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로마의 상징인 콜로세움과 포로 로마노뿐 아니라, 도로 한복판에 덩그러니 남은 과거 로마의 흔적들은 나의 시선을 빼앗아 가기 충분했다. 하루 종일 로마의 흔적을 마주하며 걷다 보면 로마는 걸어 다녀야 비로소 아름다움을 가득 만날 수 있는 도시라는 것을 점점 깨닫게 되었다. 여행지의 유명 관광 명소를 방문해 인증샷을 찍으며 사진에 발자취를 남기는 것보다 내 두 눈에 그리고 기억 속에 생생하게 순간순간의 기록을 남기는 게 더 귀한 것임을 매 순간 깨닫는다. 그리고 로마는 이렇게 즐겨야만 아름다움을 맛볼 수 있는 도시임을 나는 이번 여행을 통해 배웠다.
로마에서는 바티칸 박물관을 제외하고는 어떤 미술관, 박물관을 가지 않았다. 그냥 걷는 게 좋아서 이곳저곳 발길 닿는 대로 걸어 다녔다. 걷다가 힘들면 잠시 멈춰서 젤라또를 먹고 힘을 얻어 다시 걸었다. 그랬더니 로마의 숨겨진 모습이 드러났다. 마치 원석이 사람의 손길을 받아서 보석이 되는 것처럼 전에는 몰랐던 로마의 진짜 아름다움을 비로소 만날 수 있었다.
나의 눈길이 닿는 곳, 발길이 닿는 곳 어디나 보석이자 유물 그 자체인 로마. 나는 어느새 로마가 너무 좋아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