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나는 나름 교육관이 있는 엄마라고 생각했었다. 관련학과를 나오기도 했지만 학원에서 일할 때, 사교육 시장의 한계를 몸소 체험했기 때문에 아이를 키우게 되면 무조건 사교육에 의지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아이들에게 다양한 경험과 부모와 함께 하는 시간을 주고 싶었다.
아이를 낳고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어서 이맘 때는 놀이를 통해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평일에는 주로 놀이터에서 놀거나 집에서 보드 게임 혹은 역할 놀이를 하며 놀고 주말에는 산에 가거나 숲 체험을 하는 등 산으로 들로 다니며 아이들을 충분히 놀게 해주고 있다. 그러다 보니 학원은 예체능 위주로 첫째는 미술과 수영만, 둘째는 수영만 다니고 있다. 내가 학원을 선택하는 기준은 단 두 개, 가성비와 아이가 좋아하느냐이다. 미술과 체육도 본인들이 몇 개월 동안 다닌다고 졸라서 보내주었다. 주변 또래 친구들 중에서 우리 아이들이 학원을 가장 적게 다니는 편이긴 하지만 하루 30분-1시간씩 집에서 엄마나 아빠가 공부를 시키면서 습관을 잡아주고 있고, 아직은 게임기도 핸드폰도 잘 모르는 아이들은 지금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
평소 아이들의 교육 방향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해 놔서 아이를 키우면서 크게 가치관의 혼란은 없었지만 단 하나 영어 교육은 예외였다. 남편은 주입식 영어를 배워서 문법과 독해에 비해 리스닝 스피킹이 꽝이었고, 나는 영어 교육을 오직 학교에서만 받아서 영어 실력이 엉망이었고 수능은 그럭저럭 봤지만 대학교 내내 바닥인 영어 실력 때문에 계절학기며 과제며 무척 힘들었다.
영어 교육에만은 자신이 없었기에 처음엔 아이에게 학원을 가자고 했다. 하지만 아이가 영 내키질 않아했고 때마침 학교 방과 후 줌 수업으로 영어 수업이 개강하고 원어민 선생님이 진행을 한다고 해서 신청을 했다. 우리 아이는 영어 교육을 전혀 받지 않아서 유치원에서 대문자만 겨우 익힌 정도, 그것도 쓰라고 하면 몇 글자는 제대로 못쓰는 그냥 그런 수준이었다. 나름 가장 쉬운 클래스를 선택했고 음가 수업 반이었기 때문에 나는 알파벳 별로 대문자 소문자를 익히고 소리를 알고 그에 맞는 단어를 아는 수준으로 수업이 진행될 거라고 예상했었다. 하지만 이게 웬일인가? 영어 수업이 몹시도 어려웠다. 책은 온통 소문자뿐이었고 내용도 단모음이 아니라 이중 모음이나 장모음이 주된 내용이었다. 단어도 단어지만 문장도 읽어야 해서 아이에게는 총체적 난관이었다.
아이는 처음에는 흥미를 보이다가 도통 알아들을 수 없으니 수업 시간 내내 하품을 하거나 나를 쳐다보면서 무슨 소리인지 해석해 주기를 원했다. 그도 그럴 것이 ABCD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아이가 하루아침에 무슨 수로 문장을 이해하고 읽을 수 있겠는가?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나였다. 상담을 해 보았으나 다른 반 수업도 수준이 비슷하다고 했다. 이미 수업을 신청했으니 삼 개월만 버텨보자는 생각으로 하루에 한 시간씩 한 달 동안 아이에게 예습과 복습을 하게 하며, 동시에 대문자 소문자를 가르쳤다. 수학으로 말하면 숫자와 더하기 곱하기를 동시에 가르치는 느낌이었다. 아이는 엄마에게 영어를 배우며 울고, 짜증을 부렸다. 지친 나도 몇 번이나 학원에서 배우라고 했지만 아이는 학원은 절대 가고 싶지 않다고 혼나면서도 엄마에게 배우기를 원했다.
인내심이 바닥을 치던 어느 날이었다. 저녁에는 엄마가 피곤하니 미리 공부를 하자고 했지만 아이는 놀고 싶다며 듣지 않았고, 저녁에 영어 공부를 하기로 했다. 피곤한 아이와 엄마 둘 다 제대로 수업을 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결국 나는 꿀밤을 때리고 말았다. 아이는 갑작스러운 엄마의 손짓에 놀라 덜덜 떨었다. 그런 아이를 보며, 또다시 화를 참지 못한 나 자신을 원망했다. 부모로서 수치스러움과 후회가 밀려들었다. 나는 공부를 끝낸 후 아이에게 정말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엄마가 잘못했다고 누구도 때리면 안 되는데 너를 떄려서 너무 미안하다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서도 복잡한 기분이 진정이 되지 않았다. 미안해서 눈물도 났다.
공부 그까짓 게 뭔 대수라고 작은 화도 참지 못하고 아이에게 화를 내버린 걸까?
오늘도 엄마로서 자존감이 미끄러지고 있는 나에게 슬며시 첫째가 다가온다.
"첫째야 우리 영어 그만 할까? 너는 잘못한 게 없어, 자꾸 화를 내는 엄마가 스스로 미워서 그래."
나의 물음에 첫째의 얼굴에 엄마를 무서워했던 방금 전의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비장미로 가득 찬다. 곧 앙다물었던 야무진 입술을 뗀다.
"힘들어도 할 수 있어요. 내가 학원 안 가고 선택한 거니까요. 어려워도 엄마랑 공부하고 싶어요. 이미 신청한 건 다 끝내고 나중에 생각해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