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번째 아파트 매매

by DJ

끝내 하나의 아파트를 골랐습니다. 강남역 인근,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지하철역에서 걸어서 10분, 커피 향이 가득한 골목과 깔끔한 상가가 있는 동네였습니다. 그곳에 제 이름으로 된 집이 생긴다는 건, 마치 인생의 새로운 장을 여는 일 같았습니다. 가격은 10억 원. 전세를 끼고 매매하면 제 돈은 3억이면 충분하다고 계산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3억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취등록세만 5천만 원. 처음엔 세금 고지서를 보고 오타인 줄 알았습니다. ‘이게 진짜냐’는 말이 절로 나왔습니다. 돈을 모아도 모자랐습니다. 결국 마이너스 통장을 탈탈 털었습니다. 한도까지 꽉 채워 쓰고, 살던 집의 전세를 반전세로 바꿔 보증금 일부를 돌려받아야 했습니다.


복비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때는 ‘복비’라는 단어가 왜 ‘복(福)’으로 시작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불복(不福)’에 가까웠습니다. 하지만 계약이 끝나고 서류를 넘겨받던 날, 도장 위로 번지던 제 이름을 보며 묘한 희열이 밀려왔습니다. 사실 긴가민가했습니다.


그리고 생전 살아계시던 외할머니의 한마디가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제가 “10억짜리 집인데 제 돈은 3억만 들어갔어요. 나머지는 전세금이예요.”라고 하자, 외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그냥 맡아둔 거구나.” 맞는 말씀이었습니다. 제 명의로 된 집이지만, 실제로 그 안에는 남의 돈이 더 많이 들어 있었습니다. 세입자의 전세금, 은행의 대출금, 그리고 제 빚. 그 집의 진짜 주인은 돈을 낸 사람이라면, 저는 그저 이름표를 붙인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레버리지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것을 결정하고 리스크를 앉고 실행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저는 ‘허리띠 졸라매기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습니다. 대출이 늘어나자 매달 갚아야 하는 이자도 차츰 늘었습니다. 아침엔 아이 둘을 등교시키고, 낮엔 회사에서 일하고, 밤엔 이자 계산기를 돌리며 한숨 쉬던 시절이었습니다. 가계 소비가 줄어드니 부부싸움도 자주 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부동산 정책은 정말 매년 발표되었습니다. 재산세는 올라가고, 대출은 줄어들고, 전세대출은 막혔습니다. 뉴스만 켜면 ‘집 가진 사람은 죄인’이라는 분위기였습니다. 이러다간 집값이 떨어지기도 전에 제 체력이 먼저 떨어지겠다 싶을 정도였습니다. 어느 정책은 보유세를 올리고 그 다음은 대출을 조이고, 다시 양도세를 올리고 정말 부동산 대책을 따라가는데만도 벅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저는 참 용감했습니다. 이자는 무섭고 세금은 가혹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시절은 인생의 가장 ‘짠내 나는 코미디’였습니다. 월급날이면 은행이 제 돈을 가져가고, 아내와 힘든 맞벌이를 버텨내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두 아이까지 간신히 키워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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