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를 틀어 놓은 채 설거지를 하는 중이었다. 조나단 채널 영상을 보고 있었는데 나단이가 말했다. “저랑 친하게 지내려고 하는 것 같아요. 저랑 대화를 많이 하려고 하는 편이에요.” 나단이의 말을 듣는데 나에게 미안해졌다. 분명 미안함이라는 감정이었다. ‘누구에게도 들이밀지 않는 ‘쓸모’라는 괴상한 기준을 나에게 들이밀고 있었네. 내가 나를 할퀴고 있었네.’ 하는 깨달음에서 비롯한 미안함이었다.
‘쓸모라는 해괴한 기준을 버리고 나를 인정해보자! 나에게 관대 해보자!’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건데?’하는 생각이 들며 멍, 그리고 텅 빈 것 같았다.
‘나는 단지 나일 뿐이야. 숨만 쉬고 있어도 충분히 사랑받을 만해.’라고 생각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일면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러다 안일하게 게을러지다가 결국은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나를 포기하게 되는 게 아닐까?’ 하는 날선 경계심이 먼저 가시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아니, 나한테 관대해지는 거 그거 대체 어떻게 하는 건데?’하는 생각은 ‘성취’와 ‘성장’이라는 말로 귀결되었다. 나 자신을 존중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향해 보낼 수 있는 리스펙, 그러니까 적절한 성취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성취’와 ‘성장’은 ‘성공’, ‘성과’와는 조금 다른 말인 것 같지만, 네 단어 모두 ‘지향주의’라는 말을 뒤에 붙였을 때 영 달갑지 않은 말이 되어버린다. ‘성취 지향주의’, ‘성장 지향주의’, ‘성공 지향주의’, ‘성과 지향주의’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끊임없이 사람을 앞으로 나아가도록 몰아세우는 말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내 언어 생활에서 도무지 잘 등장하지 않는 말들인데, 스스로 ‘성취’와 ‘성장’이라는 단어에 도달하자 부정적 카테고리로 분류되어 있던 단어가 슬그머니 긍정적 카테고리로 옮겨오는 것 같았다.
틈틈이 시간내서 자기를 계발 해나가는 부지런한 친구들이 하나 둘 떠오르기도 했다. 퇴근 후 동료들과 코딩 스터디를 하면서 한 단계씩 성장하는 것 같아 즐겁다고 했던 관* 오빠, 지역 내 여자 풋살 모임을 수소문해서 매주 풋살 모임에 나가더니 대회에 나가 준우승까지 해온 시*, 쉬는 날이면 커피콩을 볶아 드립백을 만들고 콜드브루를 내리더니 베이킹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승* 언니, 도자기를 굽는 지*, 뜨개질을 하는 향*, 날이 좋으면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가는 태* 오빠, 클라이밍이며 달리기며 새로운 운동을 찾아 나서는 주*.
친구들의 바지런함을 볼 때면 열정도, 체력도 모든 게 기이하게만 느껴졌는데 스스로 즐거움을 느끼는 분야를 탐험하고 몰입해 가는 것이 어쩌면 자기를 아끼고, 자기의 쓸모를 찾아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했다. 자기 자신과 다정한 관계를 맺고 있는 친구들이 삶의 고수처럼 느껴졌다. 푸릇푸릇한 생명력이 친구들의 삶을 힘차게, 앞을 향해 밀어 올리는 것 같았다.
나는 나에게 무엇으로 손내밀 수 있을까? 소개팅에서 쓸모를 확인하는 그런 것 말고, 나와 무엇을 해야 나에게서도 푸릇푸릇한 생명력이 발할 수 있을까? 대답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주저없이 ‘글쓰기’가 떠올랐다.
무엇이 이토록 글쓰기를 맴돌게 하는지 모르겠다. 초등학교 시절, 방학이면 학교 신문 앞뒷면에 내 사진과 함께 글이 실리던 순간부터였을까? 엄마가 보고 싶어 한밤 중에 편지지를 꺼내고서는 후두둑 후두둑 떨어지는 눈물을 훔치면서 엄마에 관한 책을 꼭 쓰고야말겠다고 적어 내려간 약속 때문일까? 왜 돌고 돌아 결국 글쓰기인지…
오랜 시간 맴돌던 질문에 대한 답을 <브랜딩을 위한 글쓰기> 책 마지막 페이지에서 찾을 수 있었다. 19세기 후반, 어니스트 섀클턴과 남극 탐험에 나섰던 사람 중 한 명인 지질학자 제임스 워디의 말에서 말이다.
“돌이켜보면 지독히도 힘들었던 하루 중 일기를 쓰던 때가 유일하게 모든 것이 선명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루 종일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를 고민했지만 일기를 써야 할 때만큼은 ‘왜 살아남아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거든요. 대장이 일기를 쓰도록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결코 살아남지 못했을 겁니다. 그 누구도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끝까지 붙들고 있지 못했을 테니까요.” <브랜딩을 위한 글쓰기> 309쪽 중
계속되는 영하 30도 날씨에 634일간 빙벽에 갇혀 일기를 써내려 간 어니스트 섀클턴과 제임스 워디, 그리고 살아 남은 대원들의 마음을 상상해본다. 634일간 28명 대원들의 목숨을 지탱해 준 글쓰기의 힘에 대해 생각해본다.
쓰자, 쓰자. 제임스 워디의 말을 조금 비틀어서 ‘어떻게 내 쓸모를 확인할 것인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왜 내가 쓸모있는가’에 대해 끝없이 생각하고 발견하기 위해서 써야겠다. 다시, 다시 쓰기로 마음 먹었다. 나를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