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우리는 정주행 중
우리가 처음으로 같이 본 건 일본 애니메이션 시리즈 <진격의 거인>이었다. <진격의 거인>을 보기 시작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우리가 아직 연인이기 전 서로를 탐색하던 때, 그와 나눈 대화들은 대체적으로 흥미로웠다. 성향이며 취향이며 다른 게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날은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싶을 정도로 영화 취향이 다른 것은 물론이고, 공통으로 시청한 작품을 찾는 것조차 어려웠다.
문은 마블 시리즈의 굉장한 팬이었고, 웬만한 박스 오피스 영화들은 줄줄이 꿰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읊는 영화들을 대부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영화라면 디즈니, 픽사, 지브리의 몇 편의 애니메이션과 아주 극소량의 한국 독립 영화가 전부인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아 들어는 봤던 것 같은데…’ 말고는 없었다. 대학 도서관 입구에 떡 하니 서있는 ‘교양 권장 도서 100권’ 목록처럼 한 번쯤 봤을 법 한 영화(이를 테면 매트릭스, 반지의 제왕)를 한 개도 보지 않은 게 신기한지 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되물었다.
“은숙님 영화 안 좋아하세요? 주로 뭐 보셨어요?”
나는 <인사이드 아웃>, <코코> 같은 픽사를 훑고 지브리 애니메이션으로 넘어갔다. 그러자 조금 말이 통하기 시작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모노노케 히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문도 재미있게 봤다고 했다.
‘오, 이제 말이 좀 통하는군?’
일본 애니메이션을 주제로 이야기를 하다 보면 말이 통할 것 같았다. 그래서 눈을 반짝이며 물어보았다.
“제일 감명 깊게 본 일본 애니메이션이 뭐예요?”
“진격의 거인이요.”
“...?”
당연히 지브리 애니메이션으로 대동단결할 줄 알았는데 갑자기 분위기 <진격의 거인>…? 눈치없이 진격하는 이 대화 주제 뭔데….
나에게 <진격의 거인>은 기괴한 애니메이션이었다. 알몸의 거인들이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사람을 잡아 먹는 장면을 어딘가에서 본 후로 절대 볼 일은 없겠다고 생각한 것은 물론 ‘저런 걸 보는 사람들은 대체 어떤 생각인걸까?’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나와버렸다. <진격의 거인>.
나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유지가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문에게 물었다.
“<진격의 거인> 어떤 부분이 감명 깊으셨어요?”
그러자 한참을 고심한 그가 하는 말.
“진격의 거인은 사랑 이야기에요.”
해괴한 거인들이 뛰어다니고 식인을 하는 그게 사랑 이야기라고? 높은 확률로 예상해보건대 그때 분명 나의 포커페이스는 무너졌을 것이다. 그러니 그가 말을 덧붙였겠지….
“진짜예요! 절절한 인류의 사랑 이야기에요!!”
아무리 생각해도 <진격의 거인>과 ‘사랑’은 맞지 않는 것 같은데… 그가 생각하는 사랑이란 대체 무엇일까? 그날로 집에 돌아와 <진격의 거인>을 정주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리즈가 4기까지 이어지는, 대하드라마에 버금가는 대장정을 끝내지 전에 우리는 연인이 되었다. 그래서 데이트로 같이 보게 된 첫 번째 애니메이션이 <진격의 거인>이 되버린 것이다.
문은 다시 봐도 명작이라며 예찬을 멈추지 않았고, 나는 그가 ‘사랑이야기’라고 했는지 어렴풋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