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가을]
슈퍼마켓.
다영은 장바구니를 들고, 윤서의 휠체어를 밀었다.
토요일 오후. 장 보는 날.
"윤서 씨, 오늘 뭐 먹고 싶어?"
"음... 된장찌개?"
"좋아. 두부 사자."
채소 코너를 지나, 계산대로 향했다.
그때였다.
"아이고..."
뒤에서 아줌마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 집 남편, 장애인이래."
다영의 손이 멈췄다.
"그래? 아이고, 부인 고생이 오죽하겠어."
"그러게. 저 나이에 저런 남편 모시고 사시네."
윤서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고개가 숙여졌다.
"근데 부인도 참 대단하네. 나 같으면 못 살아."
"그러게. 저게 쉬운 일이 아닌데."
다영의 손이 휠체어 손잡이를 꽉 쥐었다.
"젊을 때 뭘 잘못했길래 저런 남편을..."
다영은 휠체어를 멈췄다.
돌아섰다.
"실례합니다."
아줌마들이 놀라 돌아봤다.
"저희 대화, 다 들립니다."
"... 아, 그게..."
"남편이 장애인이라고요? 맞아요. 휠체어 타요."
다영의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또박또박 말했다.
"근데 그게 제 남편의 전부는 아니에요."
아줌마들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남편은 저한테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사람이에요. 29년을 함께 산 사람이에요.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저한테 '사랑해'라고 말하는 사람이에요."
"... 죄송합니다."
"그리고 '젊을 때 뭘 잘못했길래'라고 하셨죠?"
다영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저는 아무것도 잘못 안 했어요. 그냥 사랑했을 뿐이에요."
목소리가 떨렸다.
"사랑하는 게 잘못인가요?"
아줌마들은 아무 말도 못 했다.
다영은 돌아섰다.
휠체어를 밀어 계산대로 갔다.
손이 떨렸다.
온몸이 떨렸다.
계산을 하고, 장바구니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 * *
주차장.
차에 타고 나서야, 다영은 눈물을 흘렸다.
"다영..."
윤서가 조용히 불렀다.
다영이 말했다.
"괜찮아."
하지만 괜찮지 않았다.
29년째 듣는 말들.
여전히 아팠다.
익숙해질 것 같았는데, 익숙해지지 않았다.
"미안해요. 내가... 당신 인생을 이렇게 만들어서..."
"그런 말 하지 마."
다영이 윤서의 손을 잡았다.
"당신 때문이 아니에요. 저 사람들이 모르는 거예요."
"하지만..."
"우리가 얼마나 행복한지, 저 사람들은 몰라요."
다영이 윤서를 봤다.
"나는 행복해요. 윤서 씨."
"... 나도."
윤서의 목소리가 잠겼다.
"나도 행복해요. 다영 때문에."
* * *
[2024년 겨울, 은서의 목격]
12월 어느 토요일.
은서는 오랜만에 집에 왔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와 서였다.
"은서야!"
다영이 환하게 웃으며 맞아주었다.
"엄마."
"어머, 우리 딸 왔네! 윤서 씨, 은서 왔어요!"
거실에서 윤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은서야? 정말?"
은서는 거실로 들어갔다.
윤서가 휠체어에 앉아 미소 짓고 있었다.
"아빠."
"은서야. 잘 지냈어?"
"응."
어색한 침묵.
"밥 먹었어?"
"아직."
"그럼 엄마가 뭐 해줄게. 뭐 먹고 싶어?"
"아무거나."
다영이 부엌으로 갔다.
은서는 소파에 앉았다.
윤서와 거실에 둘만 남았다.
"회사는... 어때?"
"괜찮아요."
"힘들지는 않고?"
"아니요."
"그래..."
또 침묵.
"은서야."
"응?"
"크리스마스 때 집에 있을 거야?"
"... 모르겠어요. 회사에 일이 있을 수도 있어서."
거짓말이었다.
윤서는 알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 알았어."
* * *
저녁을 먹고, 은서는 산책을 나갔다.
"잠깐 나갔다 올게요."
"어디?"
"그냥 동네 한 바퀴."
"같이 갈까?"
다영이 물었다.
"아니, 괜찮아. 혼자 갈게."
은서는 밖으로 나갔다.
공원을 걷다가, 벤치에 앉았다.
휴대폰을 봤다.
친구들 단톡방이 시끌벅적했다.
[수진] 크리스마스 때 뭐 해?
[민지] 나 남자친구랑 데이트!
[지은] 나는 가족들이랑 저녁 먹어
[수진] 은서는?
은서는 답장을 쓰려다가 멈췄다.
뭐라고 하지?
가족들이랑 보낸다?
거짓말이야.
나는 크리스마스에도 집에 안 갈 거니까.
은서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한숨을 쉬었다.
* * *
그때였다.
"은서야?"
뒤에서 엄마 목소리가 들렸다.
은서가 돌아봤다.
다영이 윤서의 휠체어를 밀고 오고 있었다.
"엄마? 왜 나왔어?"
"아빠가 산책하고 싶대서."
다영과 윤서가 은서 옆 벤치에 섰다.
"같이 있어도 돼?"
"... 응."
셋이 공원에 앉아 있었다.
침묵이 흘렀다.
* * *
그때였다.
공원으로 젊은 부부가 걷고 있었다.
유모차를 밀고.
아기가 울었다.
"으앙! 으앙!"
엄마가 아기를 안아 올렸다.
아빠가 아기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괜찮아."
행복해 보였다.
은서는 그 모습을 보다가, 아빠를 봤다.
윤서도 그 가족을 보고 있었다.
눈빛이 슬펐다.
은서는 알았다.
아빠도 저렇게 하고 싶었을 거라는 걸.
나를 안아 올리고, 머리를 쓰다듬고.
하지만 할 수 없었다.
은서의 가슴이 아팠다.
* * *
그때, 다른 벤치에 앉아 있던 할머니 둘이 속삭였다.
"저 사람들 봐."
"응?"
"저 남자, 휠체어 타네."
"진짜네. 부인 고생이겠어."
"딸도 있는데... 딸이 얼마나 힘들겠어."
은서의 몸이 굳었다.
"저런 아빠를 두면 애가 힘들지. 친구들한테 놀림받고..."
은서는 주먹을 쥐었다.
다영도 그 말을 들었다.
얼굴이 굳었다.
윤서는 고개를 숙였다.
은서는 할머니들을 쳐다봤다.
가서 뭐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말이 맞았으니까.
나는 정말 힘들었으니까.
친구들 눈치 보고, 아빠 보기 불편했으니까.
은서는 눈물이 났다.
"엄마, 나 먼저 들어갈게."
은서는 일어섰다.
"은서야?"
"머리 아파. 먼저 갈게."
은서는 뛰듯 걸어 집으로 향했다.
* * *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침대에 쓰러졌다.
울었다.
미안해.
아빠, 미안해.
엄마, 미안해.
나 정말 나쁜 딸이에요.
나도 아빠가 부끄러워요.
사람들이 쳐다보는 게 싫어요.
친구들한테 말하기 싫어요.
나쁜 딸이에요.
은서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
* * *
[다영의 글]
그날 밤, 다영은 티스토리에 글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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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시선의 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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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말한다.
"대단하시네요."
"고생이 많으시겠어요."
"나 같으면 못 살아요."
그 말들이 위로가 될 거라고 생각하나 보다.
하지만 그 말들은 칼이다.
"대단하다"는 말은 "당신의 삶은 정상이 아니다"는 뜻이다.
"고생이 많다"는 말은 "당신 남편은 짐이다"는 뜻이다.
"나 같으면 못 산다"는 말은 "당신은 불쌍하다"는 뜻이다.
나는 대단하지 않다.
그냥 사랑할 뿐이다.
나는 고생하지 않는다.
그냥 함께 살뿐이다.
나는 불쌍하지 않다.
그냥 행복할 뿐이다.
오늘 슈퍼에서 또 들었다.
"젊을 때 뭘 잘못했길래..."
나는 아무것도 잘못 안 했다.
사랑했을 뿐이다.
사랑하는 게 잘못인가?
진짜 장애는 윤서의 다리에 있는 게 아니다.
사람들의 시선에 있다.
"장애인"이라고 보는 순간, 그 사람은 한 명의 인간이 아니라 "불쌍한 대상"이 된다.
윤서는 장애인이 아니다.
윤서는 그냥 윤서이다.
내 남편.
은서의 아빠.
책 읽는 걸 좋아하고, 커피를 좋아하고, 나와 산책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
휠체어는 그냥 윤서가 걷는 방법일 뿐이다.
사람들은 묻는다.
"힘들지 않으세요?"
묻고 싶다.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게 힘든가요?
아침에 눈 뜨면 옆에 있는 사람이 힘든가요?
저녁에 같이 밥 먹는 게 힘든가요?
나는 안 힘들다.
행복하다.
세상이 바뀌었으면 좋겠다.
"저 사람 불쌍해"가 아니라 "저 부부 보기 좋네"라고.
"고생하시겠어요"가 아니라 "행복해 보이세요"라고.
그날이 올까?
나는 기다린다.
29년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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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고 나서, 다영은 창밖을 봤다.
윤서가 거실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휠체어에 앉아서.
저 사람이 내 남편이다.
29년을 함께 산.
앞으로도 계속 함께 살.
그리고 나는 행복하다.
다영은 웃었다.
거실로 나가 윤서 옆에 앉았다.
윤서의 손을 잡았다.
"뭘 읽어요?"
"음... 소설."
"재밌어?"
"응."
윤서가 다영을 봤다.
"당신도 읽어볼래?"
"좋아."
다영은 윤서 옆에 앉아 함께 책을 읽었다.
이게 우리의 행복이다.
작고, 평범하지만.
우리에게는 세상 전부다.
* * *
[윤서의 일기]
그날 밤, 윤서도 일기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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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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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슈퍼에서 또 그런 말을 들었다.
"저 나이에 저런 남편..."
다영이 화냈다.
29년 동안 처음 봤다.
항상 참기만 하던 다영이.
미안하다.
내가 다영 인생을 망쳤다.
29년 동안 고생만 시켰다.
오늘 은서가 집에 왔다.
오랜만에.
공원에서 산책하다가 할머니들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저런 아빠를 두면 애가 힘들지..."
은서의 표정이 굳는 걸 봤다.
나 때문에 은서도 힘든 거다.
나 때문에 은서가 친구들 눈치 보고, 나 때문에 은서가 집에 안 오는 거다.
미안하다, 은서야.
네가 자랑스러워할 아빠가 되지 못해서.
네가 친구들에게 말할 수 있는 아빠가 되지 못해서.
하지만 한 가지는 안다.
나는 다영 때문에 행복하다.
은서 때문에 행복하다.
29년째.
매일.
이렇게 행복한 건 잘못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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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게 잘못인가요?"
29년째, 우리는 함께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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